꽤 긴 시간 동안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그 꾸준함과 좋아하는 그 대상을 향한 성실함, 대상을 쟁취하기 위해 불사할 수 있는 그 열정에 이르기까지, 이미 그 사람이 가진 장점을 증명하는 셈이 아닐까. 그래서 난 '덕후'들을 좋아한다. 그 열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 영감을 준다. 이번에 읽은 책 역시 덕후에 대한 책으로, 뉴욕규림일기를 통해 비범함을 언뜻 내비친 바 있는 김규림 작가의 '아무튼, 문구'를 소개해본다.
문구 덕후들이라면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책이 아닐까. 2019년 7월에 출간된 책으로, 나 역시 진즉 읽었음에도 독후감을 올리지 않았던 연유는, 여러 번 곱씹어 읽었던 덕분이다. 한 번 읽은 뒤 좀처럼 다시 읽을 마음 안 드는 다른 여러 에세이, 산문집들 이건만 이 책은 이따금 생각날 때마다 계속 들추어보게 된다. 어마어마한 통찰을 주는 책이 아님에도 계속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읽을 때마다 느끼는, 딱히 형용할 수 없는 흐뭇함이 아닐까.
귀엽고 가벼운 것들이 즉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명랑한 친구들이라면, 클래식한 오브제들은 말수는 별로 없지만 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속 깊은 친구 같다. 이 친구들을 바라보고 어루만지는 일에 나는 시간을 과감하게 쓰고 있다. 집에서 대체 뭘 그렇게 하느냐는 말에 나는 퍽 억울하다. 책상 위에도 나름대로의 분주한 시간들이 있단 말이다. <아무튼, 문구> 中
무언가에 흠뻑 빠진 사람을 보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즐거운 일이다. 좋아하는 대상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에게선 어떤 눈부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엔 별다른 반응 없는 어떤 이가 특정한 주제를 이야기할 때 눈빛이 달라진다면 그 사람은 그 분야의 덕후가 아닐까. 작가 김규림 님에겐 문구가 바로 그러한 분야인 듯 보인다. 만년필, 종이, 스티커, 형광펜 등 무언갈 직접 쓰기보다 노트북과 태블릿이 더 익숙한 요즘이건만 그녀는 여전히 문구를 사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연애편지 같기도, 혹은 사랑의 세레나데 같기도 하다.
책을 통해 그녀는 애정을 듬뿍 쏟고 있는 대상에 대해, 그러니까 종이, 펜과 같은 소소한 아이템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또, 이건 꼭 사야만 한다며 설득하기도, 때론 꼭 필요해야 사는 거냐며 되려 반문하기도. 누군가에겐 '어쩌라는 건가' 싶을 수도 있지만, 무언가에 애정을 쏟아본 경험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공감하리라. 본디 무언갈 좋아하는 마음이란 것이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빙긋이 웃음이 지어지는 건 작가의 모습이 '나와 같아서'가 아닐까. 계속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역시 그 글 속에 내가 보이기 때문 아닐까.
시종일관 저자가 좋아하는 문구에 대한 이야기다. 언급했듯 화려한 문장이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혹은 이거다 싶은 명문들이 즐비한 책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읽어보기를 권면하고 싶은 건, 화려한 장식들 다 걷어낸 담백한 문장에 느껴지는 힘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흠뻑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필히 읽어보길 바란다. 책을 읽는 동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리라 확신한다.
그녀에게 문구가 그러하듯, 나에게는 책이 그러한 존재다, 딱히 필요로 설명할 수 없는 애정의 대상.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는 그 대상이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보는 한편, 생각을 넘은 탐구 또한 시도해 보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