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이 돌아가셨다.
오랜만에 외출하셨다 코로나에 걸리셨고,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셨다고 했다.
응급실로 갔지만 환자가 너무 많아
병원을 몇 군데나 옮겨야 했고,
겨우 입원했을 때는 너무 늦었다고 한다.
그렇게,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갑작스런 오빠의 부고를
전해 들은 엄마의 목소리는
충격과 슬픔, 그리고 허망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 모습조차 보지 못하고,
유품 하나 만져보지도 못한 채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
너무도 잔인한 현실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 목소리를 들으며,
영국이라는 이 먼 나라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어
결코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화도, 메시지도, 사진도, 영상통화도.
그래서 때론 ‘멀리 있다’는 감각을 잊고 살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모든 기술이 한순간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절감한다.
엄마가 가장 힘든 시간에 나는 거기 없었고
엄마의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했다.
게다가 코로나가 덮친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을 날아가도
몇주간의 격리 때문에
곧장 가족을 만날 수조차 없었다.
영국은 이미 코로나 관련 규제를 다 풀어버렸다.
마스크 착용은 개인의 선택이라며,
사람들은 다시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간 듯 행동했다.
확진자 수도, 사망자 수도
이젠 집계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다 건너에서
코로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볍게 지나가지만,
누군가는 생명을 잃는다.
누군가에겐 지나가는 감기겠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나 큰 상실이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내가 외출한다고 하면 연신 말하셨다.
“마스크 꼭 써야 한다.”
“너무 붐비는 곳엔 가지 말고.”
그때마다 괜찮다고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엄마 손 한 번 잡아줄 수 없다는 것이
그저 너무 죄송했다.
외국에서의 삶은 늘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끝엔 늘 거리감이 있었다.
나는 늘, 무언가 중요한 순간에
거기 없는 사람이었고,
가장 필요한 순간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부디, 이 역병이 빨리 끝나기를.
부디, 더는 소중한 이를
황망하게 잃는 이들이 없기를.
부디, 멀리 있는 누군가가
이런 슬픔 앞에서 다시는
무력함을 느끼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