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은 잠시, 고장은 매일

영국 빅토리안 하우스의 현실

by 이음

그렇게 기적처럼 구한 집은
백년도 넘는 빅토리안 하우스의

엘리베이터 없는 꼭대기 3층 집이었다.

런던 중심가에서 영국인 보증인도,

보증금도, 선불도 없이는

계약 자체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이 가격에 들어올 수 있는 집이라니
하늘이 도왔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이사 당일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짐을 줄인다고 줄였지만,

2년 동안 불어난 짐은 생각보다 많고 무거웠다.

엘리베이터 없는 집의 3층까지

그걸 옮기느라 어찌나 고생했던지...

바이킹 같이 생긴 트럭 기사는 혼자선 무리라며

건물 입구에 내려놓고 그냥 떠나버렸다.


결국 내가 짐을 상자에서

하나하나 꺼내 옮겨야 했다.
그래도 무사히 이사를 마쳤다.

헬퍼를 몇명 고용하고 싶었지만 엄두가 안났다.

돈이 없으면 결국 고생이다.
그 단순한 진실이 다시 한번 내 앞에 놓였다.


겉보기엔 런던 드라마에서 봤던

그림 같은 영국집 같지만

살아보니 코미디 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오래된 집이라 여기저기 늘 고장이 났다.

아래집에서 물을 많이 쓴 날이면

샤워 중에 물이 뚝 끊겼고

수압이 낮아 변기는 자주 말썽을 부렸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밤은

자고 있는 데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전기 누전으로 정전이 된 날도 다반사였다.

문득, 한국의 모던한 아파트가 그리웠다.

주방엔 최신 인덕션이 있고,

욕실에는 수압 빵빵한 샤워기,

당연히 있는 엘리베이터,

창문만 닫으면 조용한 실내,

당연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이곳에선 참 귀하고 어려운 일이 되었다.


여긴 그저, 집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일들이 많다.
그런데도 지금 내게는, 이 집이 감사한 공간이다.


무엇보다, 동네가 좋다.
대학교와 오래된 서점,

작가들의 생가가 모인 시내 중심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
밤마다 들려오던 고성방가는 사라지고,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창밖을 채운다.

혼자 걷는 밤길이 더 이상 무섭지 않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꽤 많이 놓였다.


집 안엔 낡았지만 기본적인 살림살이들이 있었다.
다양한 접시와 오븐, 세탁기.
이전 기숙사에선 볼 수 없었던

생활의 흔적들이 있어
비로소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집에서 좋은 기운을 받아

꼭 좋은 곳에 취직하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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