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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y 26. 2023

살아가는 데에도 정해진 설명서가 있다면

내가 직접 만드는 설명서



필름 카메라를 선물 받았다. 필름 카메라라니. 이 무슨 옛 유물일까. 어릴 적 소풍 가기 전 날 챙겨야 하는 필수 준비물에는 까맣고 무거운 필름 카메라가 있었다. 아니, 알록달록 색이 들어간 일회용 카메라를 좀 더 많이 챙겼겠구나. 들뜬 마음으로 36컷을 남김없이 채우고 사진관으로 향한다. 그때 그거 잘 나와야 하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는 길은 걱정과 염원으로 가득했다. 며칠 뒤 사진관에 가서 인화된 사진을 찾으면 '맞아! 이때 이랬었지. 잘 나왔다. 이건 흔들렸네.' 하며 엄마 아빠랑 사진을 한 장씩 넘겨보며 이야기하는 행복이 있었다. 작은 품평회가 끝난 뒤엔 책장에서 커다란 몸집의 앨범을 꺼내 펼쳐 한 장씩 순서대로 넣어 보관한다. 흑백의 조그만 필름지도 잊지 않고 같이 보관한다. 밝은 빛에 비춰 보면 조그만 피사체가 보이는 것이 신기한 마음에 꺼내보곤 했다. 이 모든 것은 수고스럽고 기다림의 연속인 느림의 미학이었다.



유행은 돌고 돌아 필름 카메라를 다시 찾아 쓴다. 맞아. 그만이 가진 감성이 있지. 추억이 있는 사람에겐 그 시절의 아련함을 가져다주고 한두 번의 터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 익숙한 친구에게는 신선함을 가져다준다.



추억에 잠겨 설렁거리는 마음을 뒤로하고 필름을 카메라에 끼우기 위해 필름 보관함 뚜껑을 열고 필름을 꺼냈다. 귀엽고 작은 원기둥의 플라스틱 통 모양도, 샛노란 얼굴을 한 필름도 어쩜 너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구나. 함께 들어있던 설명서를 펼쳐 들고 하나씩 따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기와 불협화음을 내는 나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돼 시작도 전부터 긴장한다. 2번 순서까지는 잘 된 것 같아. 잘 따라가고 있어!, 하고 안심한 순간 얼마 못 가 헤매기 시작한다. 설명서 그림에 있는 구멍이 안 보인다. 이건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걸까. 답답하다. 한참을 이렇게 저렇게 다시 처음부터 해보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삼십 분 넘게 씨름하다 결국 우리의 해결사 초록창으로 향한다.



본 설명서보다 조금 더 입체감이 느껴지는 안내를 보고 따라 해 보니 설명서에 나온 그림과 비슷하게 얼추 된 것 같다. 필름 하나 끼우는 데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다니.



글과 그림으로 순서까지 매겨 친절하게 정답을 알려줘도 따라가지 못하고 헤매는 나란 사람이구나. 알고 있었지만 다시 또 알아버린다. 오래되긴 했지만 이미 해 본 일이었다.  


답이 나와있어도 그대로 따라 하기 어렵다면, 세상에서 제시하고 안내하는 답도 어차피 따라갈 수가 없겠구나.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 문제구나.



설명서대로 하면 된다고 알려줘도 따라가기 어려운 사람에게 정답이라고 '추측'되는 길을 가지 않는다고 나무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왜 내가 이렇게 남과 다른 모습인지 최근까지도 의구가 일었다. 사소하게 보면 남들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자주 다운되고 심각해지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크게 보면 주변과 다른 모양의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받아들이기가 괴로웠다.



확실한 답을 모르겠고 알려줘도 못 따라갈 바엔 내가 정답을 만드는 편이 더 빠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공식에 대입해서 답을 구하는 것처럼 딱 떨어질 순 없으니까. 답안지를 어느 정도 참고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믿었다가 옆에 있는 문제집의 해설지란 걸 알게 되었을 때 허망감은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다. 답안지를 보기로 한 건 내 결정이니까.



결국 나에게 맞는 삶을 찾아 풀어내는 건 내 몫이다. 내게 딱 떨어지는 핏의 삶을 찾게 되면 그건 성공한 삶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정답이 적힌 설명서가 있다고 믿는다. 인생은 그 답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지금 하는 일에서 아무런 성취감을 못 느끼고 갈수록 소모된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불만하고 안주하는 게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최대로 멀리 도망쳐서 반대의 환경을 내가 나에게 만들어보려 시도해야 한다. 남과 다르게 느낀다고,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이상한 것도 틀린 것도 아니다. 그때그때 다른 나를 알아차려서 설명서를 만들고 커스터마이징 해야지 별 수 있나. 설명서에 어떤 내용을 더 추가해서 내게 들이밀어야 할지 바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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