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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y 31. 2023

어떤 긍정을 갖다 붙여놔도 소용없을 때

부정이 힘이 되는 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좋은 말을 다 갖다 붙여도 내 안에 담지 못하는 날이 있다. 조각난 마음을 이어 붙여 애쓰고 다 됐다 싶어 가까이 다가가보면 이어 붙인 틈새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예고도 없이 찾아올 때 통과하기 위한 방법이 있다. 멀리 떨어지라고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그다음 입으로 소리 내어 내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킨다. 그거 아니라고,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라고, 지금 느끼는 기분은 허상일 뿐이니 속지 말라고 이야기해 준다. 그러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상념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씻고 미지근한 물을 마신다. 바로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치고 펜을 든다. 두 달이 되어가는데 이제는 빼먹으면 허전한 의식이 되었다.



세 페이지를 쓰는데 대략 1시간 정도 걸린다. 집중이 잘 안 되고 딴짓을 하고 싶은 날에는 더 걸리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1시간은 어떤 방어 기제도 장착되지 않은 순수한 자아만이 존재할 뿐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휘저으며 펜이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간다. 글이 글을 물고 나온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다. 진짜 나를 만나는 순간이다. 요즘 무슨 생각이 나를 쥐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휘청이는지 알 수 있다. 쓰지 않으면 사방으로 흩어진 파편으로 붙잡을 수도 치울 수도 없는 골치 아픈 존재들이다. 일어나자마자 조각난 파편들을 모아 내 방식으로 정돈하는 이유다.



물기를 가득 머금어 맥없이 축축한 생각 풍선들을 바리바리 챙겨서 할 수 있다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기회가 있을 거라고 건조하고 뽀송하게 말린다.

경계를 헤엄치며 만난 젖은 풍선들을 볕에 널어놓고 나면 나름 괜찮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어느 날은 그런 과정이 영 내키지가 않았다. 억지스럽고 말도 안 되게 꾸며낸 것 같은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다. 여과하지 않은 위태로운 생각들과 입 안에서 맴도는 말들을 마구 써 내려갔다. '이게 맞나?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싶었지만 어느 한 곳도 어색함이 없었다. 휘몰아치던 감정이 잠잠해져 갔다. 납작하게 눌려있던 자아가 입체적으로 펼쳐진 듯했다. 하루를 망쳐버리는 건 아닐까 조심스러웠지만 멈추기가 어려웠다. 그게 진짜 나고 그게 지금의 내 마음이니까.



수많은 감정이 뒤섞이며 세 쪽 가득 채우고 났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안에 묵혀져 상하기 직전인 알 수 없는 형체의 덩어리가 밖으로 배출되어 나간 느낌이다. 그렇게 그 하루도 다소 평탄하게 보낼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나만 보는 일기장에서도 나를 속였던 걸까? 진짜 내 마음은 1인데 '2가 정답이야! 이게 맞아! 다른 사람들이 이게 맞다고 했거든.' 하며 눈치 보고 쥐어짜 내는 힘을 발휘한 걸까? 진심을 들춰낼 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동동 구르던 발 모양을 일기에서도 그렇게 복사해 붙여 넣기하고 있었다.



기쁨, 환희, 설렘. 그런 마음이 잘 먹히지 않는 날에는 그럴듯한 긍정으로 나를 포장해서 덮어주기보다 있는 그대로 괜찮지 않음을 발현하는 게 정서적으로 더 편안하다는 것을 알았다. 금세 자조적인 얼굴이 되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써내려 간다.







인스타그램으로 툰을 그려 올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날이 많았다. 물론 살기 위한 나의 몸부림으로 더 앞장서서 삶의 환희와 희망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의도지만 죄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책망받은 얼굴로 진짜 내가 힘을 실어줘야 될 말은 무엇일까 혼란스러웠다. 젖은 마음으로 작업을 미루고 숨어버리고 싶은 날이 많았다. 그럴 땐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 게 사람 사는 건데 뭐. 그럴 수도 있어'라며 나를 달래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 수두룩한 세상이라고, 겨우 이런 걸로 기죽지 말라고 어깨를 쓰다듬으며.



갈수록 내가 알고 있고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알아가기 시작하고 나아가 상대를 받아들이고 내가 상대의 입장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깨닫는 혜안인 거라면 조금은 안심이다. 그런 거라면 좋겠다.






4월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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