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망아지 고기탕과 달콤한 위미빵
“배낭이 사람 몸만 하네. 꽤 멀리서 왔나 본데? “ 어디선가 들리는 강한 중국어 억양. 분명 내 얘기인데. 침대에 설치된 간이 천막을 걷자 이름 모를 세 여성이 바삐 화장 중이다. 170cm는 훌쩍 넘는 키와 속눈썹까지 붙인 진한 화장. 어젯밤 왁자지껄하게 귀가한 왕이(网怡), 진시(瑾汐), 위씨(语汐)다.
”한국에서 왔어. 너흰 셋이 친구인가 보네.” 먼저 인사하자 한국인은 몇 년 만에 봤다며 다시금 떠들썩해진다. 고원지대 리장에서 왔다는 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색이 까맣다. ”우린 출장 왔어. 모두 직장 동료들이야. 어쩐지, 한국 여성들은 모두 얼굴이 하얗고 피부가 좋아. “ 위씨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호기심을 내비친다. 그리곤 한국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재밌게 봤다며 한동안 OST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혼자 여행 중이야. 다음 주에 리장으로 가려고.” “그럼 타이밍 맞게 잘 왔네! 다리는 지금 축제 중이니까. “
”엥, 축제? “ ”몰랐어? 오늘부터 다리의 최대 축제 산위제(三月节)가 열리는 날이야! “
어쩐지, 어제부터 도로가 꽉 막혔더라니! 중국 백족 최대 축제인 산위제는 약 일주일간 여러 지역에서 농산물을 교역하기 위해 모이는 자리다. 윈난성에서 가장 인기 많은 축제로 볼거리와 먹거리가 다양해 저녁이면 엄청난 인파가 모여든다. 중식이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이는 나로선 아주 나이스 타이밍이다.
해가 질 무렵 산위제 축제가 진행되는 광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입구부터 대규모 노상 식당들이 즐비하다. 호텔 셰프단 부럽지 않은 요리사 수십 명은 대형 볼에 고기를 볶으며 불맛을 내고 있었고, 종업원들은 번호를 호객하며 백 명은 넘는 손님들 사이를 바삐 오고 갔다.
식당 앞에 아주머니 여럿이 큼지막한 고기를 썰고 있기에 물으니 망아지 고기란다. ”다리 대표 특산품이에요. 이 고기를 먹으려고 멀리서도 손님들이 온다니까요. “ 마오뤼탕궈(毛驴汤锅)는 기름을 채운 대형 솥에 망아지 고기를 튀겨 만드는 요리다. 군침은 돌지만 중국에 혼자 여행올 땐 이게 아쉽다. 한 그릇을 주문해도 푸짐하게 나와 다 먹질 못하기 때문이다.
식당가에서 더 위로 올라가니 축제의 진면목이 펼쳐진다. 흥겨운 음악이 가득한 인도 양변으론 음식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한국 먹거리 축제랑 비슷한데 산위제는 가게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다. 하루 저녁을 모두 쓴다 해도 전체 가게를 둘러보기 조차 어렵다.
빨간 국물에 팔팔 끓고 있는 닭발부터 지글지글 구워지는 메추리알 계란빵, 해삼과 오징어 등 해산물 꼬치구이, 아이 키 만한 니우간빠(牛干巴, 소고기 육포) 등. 눈도 코도 즐겁게 하는 음식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중국판 된장 또우판쟝(豆瓣酱), 갈릭소스 수완샹쟝(蒜香酱) 등 각종 장을 파는 가게는 물론 바삭하고 쫀득한 중국 옛 간식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파는 가게들도 만날 수 있다. 뻥튀기와 비슷한데 종류가 수십 가지다. 가격도 비싸지 않기 때문에 양손 가득 빵빵한 비닐봉지를 들고 오가는 주민들의 정겨운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물론 생소한 음식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지역 축제에서도 종종 만날 수 있는 회오리 감자와 쫀득한 꽈배기빵도 만날 수 있다. 중국 길거리 음식의 대명사인 면 요리도 맛볼 수 있는데 수북이 쌓아 놓은 면들이 하나도 불지 않는 건 여전히 미스터리다. 모두 사 먹을 필요도 없다. 시식용 음식이 많기도 하고 “이걸 맛볼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면 선심껏 맛보게 해 준다. 나는 위미빵(玉米面包, 옥수수빵) 하나 집었다. 담백하고 달달해 간식으로 제격이다.
이곳저곳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사람들. 그 앞에서 함께 덩실덩실 즐기는 주민들. 나도 모처럼 여행객이란 사실을 잊고 주민의 일원처럼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여행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외롭지 않은 순간이었다. 여행의 묘미란 단순히 보고 즐기는 걸 너머 지금처럼, 스며들 때다. 운 좋으면 축제마다 열리는 경마도 구경할 수 있다는데 아쉽게도 저녁이라 관람하지 못했다.
계단에 앉아 쉬던 중 묘한 광경을 포착했다. 바로 식당 옆 넓은 공터에 발이 묶여 퍼덕이는 수 십 마리의 닭들. 행사 MC로 보이는 남자는 훌라이프를 바닥에 굴려 닭들을 원 안에 넣으려 애쓰고 있었다. 지나가던 주민에게 묻자 뭘 간단한 걸 묻냐는 듯 시큰둥하게 답한다. “티아오찌(挑鸡, 닭을 잡다)잖아요. 훌라이프 안에 잡힌 닭은 바로 옆 식당에서 현지직송(?) 닭 요리로 탄생하죠. “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경악한 표정을 짓자 주민은 손으로 축제장 가장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외국인이라면 생소할 순 있겠네요. 저 쪽으로 가면 비슷한 행사를 많이 하니 한 번 가 보세요. “ 티아오찌는 꽤 신사적이었구나. 그가 가리킨 쪽으로 향하자 눈을 더욱 의심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철장 안에 갇힌 강아지와 토끼, 햄스터. 그리고 작은 동물들을 향해 훌라이프를 던지는 해맑은 아이들. 원에 걸리면 그날부터 그 집 애완동물이 되는 거다. 흥겨운 축제 분위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녹아든 후퇴한 놀이 문화다.
충격이 가시질 않는 상태로 숙소에 가니 로비에 앉아 있던 젊은 숙소 주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 아침에 같은 룸메이트들 친구들한테 우리 숙소 한국인이 산위제 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어땠어요? “ 불현듯 떠오른 동물 행사 모습에 관해 말을 꺼내자 곰곰이 생각하던 숙소 주인은 말했다. “저도 보면 놀랄 때가 있어요. 잔인하다고 생각이 들죠? 작은 도시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모습이죠. 문화 차이라고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
자정이 넘어도 축제의 열기는 가시지 않은 듯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매번 해외를 여행하며 수 없이 마주쳐야 했던 문화적 괴리. 불현듯 야만적이라 비판하며 또다시 문화의 일면으로 포용하던 순간들. 숙소 주인의 말대로 나는 대도시를 여행하는 게 아니니까.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이 여행지에서 어떤 시선을 택할지는 오로지 내 몫이었다. 남은 위미빵을 뜯어먹으며 잘 준비를 했다. 달달하게 마무리하는 다리의 첫날 밤, 그리고 또 한 번 스며드는 중국이란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