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청백한 잔잔함을 지닌 다리(大理)에 오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저는 지난 주말 무사히 귀국했습니다. 많은 이야기들을 모아 왔으나 건강 악화로 타자를 두드리지 못했네요. 덕분에 며칠간 본가에서 뒹굴뒹굴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차근차근 지난 시간들을 되짚으며 추억을 기록하려 합니다. 이번 화부터는 제가 사랑한 도시들 중 한 곳인, 다리(大理)입니다.
새벽 내내 모기와 씨름하느라 퉁퉁 부은 눈으로 기상했다. 4월 초인데도 체감은 한여름이다. 덕분에 이른 체크아웃을 하고 거리로 나섰다. 중국 어디 지역을 가든 아침이면 거리마다 아침 식사를 파는 노점상으로 즐비하다. 만두와 찐빵부터 콩국, 옹심이 죽, 찐 계란, 니우로우삥(牛肉饼) 등 간편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다. 주문하자마자 만들어 따끈따끈하다. 가격도 대게 10위안을 넘지 않는다. 그 덕에 바쁜 직장인들도 빵이나 옥수수 등을 들고 출근을 재촉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나는 웬만하면 아침밥은 꼭 먹자는 주의다. 그러나 출근이 늦으면 대게 굶거나 편의점 삼각김밥 등을 사 먹었다. 새벽 이르게 문 여는 식당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도 예전엔 역 근처에서 김밥 파는 어머님들을 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대표 아침 식사인 요우티아오(油条, 기름에 절인 꽈배기)와 도우 쟝(豆浆, 두유)을 먹으며 아침 풍경을 즐겼다. 부모가 모는 전동차 뒤에 앉아 만두를 먹는 아이들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붉은 스카프를 맨 이곳 아이들은 유독 두 볼이 앵두처럼 달아올랐다.
쿤밍역에서 다음 여행지로 향하는 까오티에(高铁,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에서 밀린 단잠을 자느라 꾸벅꾸벅 대는데, 옆 자리 여성이 불쑥 파인애플 잼이 발린 과자를 내민다. 꾸벅 인사하고 한 입에 넣으니 맛있냐며 또 하나를 건넨다. 유독 맑은 인상의 중국인 부부, 캐나다 밴쿠버에서 온 로라와 대니얼이다.
“저희도 한 달 여행 왔어요. 남편 회사 장기근속 휴식기를 맞아서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이곳에 왔어요.” 치과의사 부부인 로라와 대니얼은 서울에도 놀러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삼겹살과 비빔밥을 먹었는데 꽤 맛있었다고. 밴쿠버에도 한국인들이 많은데 이들의 자녀들은 너무 귀엽다며 한참 동안 사진을 자랑했다.
“혼자 여행하는 게 쉽진 않을 텐데 용감해요. 그래도 영어와 중국어를 곧잘 하니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으시겠어요. 당신의 젊음이 부럽습니다. “ 로라 부부는 다른 중국 여행지들을 여럿 추천해 준 뒤 과자를 무려 세 개나 나눠주곤 다리역에서 작별했다. 언젠가 돌고 돌아 여행지에서 만나면 밥 한 끼 같이 하자며.
쿤밍이 화려했다면 옆 동네 다리는 소박한 동화 마을 같은 곳이다. 건물들은 대게 낮고 하얗게 페인팅돼 있다. 봄을 알리듯 만개한 꽃들은 하늘을 분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숙소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소수민족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머리를 꼬아 동 그렇게 올리고 흰색 벙거지 모자를 쓰거나 보라색 천으로 감싸 맸다. 이들 사이 오가는 대화는 영 알아듣기 힘들다.
다리는 소수민족 중에서도 백족(白族)과 나시족(纳西族)이 주로 살고 있는 곳이다. 백족은 전체 국민 75%이상이 해당하는 중국 내 가장 큰 민족이다. 그보다 작은 나씨족은 동파교를 믿으며 동파문자라는 상형문자를 현재까지도 일부 사용 중이다. 사용하는 언어는 중국티베트어족의 티베트버마이어파에 속하는 언어로 보통화와 달라 웬만한 중국인들도 알아듣기 어렵다.
유스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 다리구전(大理古镇)를 향했다. 소도시마다 자리해 있는 구전은 그 지역의 주요 번화가로 길거리 음식, 맛집, 기념품 가게들이 모여 있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지역 특산품을 여럿 맛볼 순 있어 아침저녁으로 관광객이 몰린다. 다만 상업화로 인해 지역마다 특색이 사라져 이모이양(一摸一样, 완전히 똑같다)이란 아쉬움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다리는 쿤밍보단 소수민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파랑과 하양으로 물들여진 직물들을 보면 그렇다. 옷이나 가방, 작은 인형, 귀걸이 등도 같은 색상으로 물들여져 있다. 나시족의 맑고 깨끗함을 나타내는 청청백백(清清白白)의미를 담고 있다. 일부 직물 상점에 들어서면 주민들이 손수 천을 물들이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나시족은 화살 쏘는 문화가 있었던 지 전통 활을 이용한 양궁장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목축업이 발달된 덕에 주 특산품은 우유로 만든 간식들. 망고와 커피, 재스민, 장미 등 다양한 맛이 나는 우유 캐러멜과 치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또 장미를 활용한 차나 장미 잎이 가득한 빵도 맛볼 수 있다. 특히 우아하고 달달한 장미향이 맛으로 구현된 장미차는 한 잔 먹고 바로 한 팩을 구매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사흘 차. 벌써부터 차를 마시고 행복해할 엄마 생각에 문득 미소가 지어졌다.
따뜻한 기후 덕에 유명하다는 버섯 볶음밥을 먹으려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고소한 향에 발길을 돌렸다. 다리구전 입구 근처 골목에 위치한 작은 식당. 뭔가 모를 장인의 위엄을 풍기는 주인 어머님. 그리고 달궈진 불판 위 동그랗게 탱탱 불어 있는 정체 모를 무언가. 홀린 듯 자리에 앉아 동그라미의 정체를 물으니 더 아리송한 대답이 돌아온다. “도우푸(豆腐,두부)”
윈난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두부 구이’. 형태도 조리법도 다양하다. 이 음식은 겉은 풍선 질감으로 쫀쫀한데 속은 부드럽게 씹힌다. 아주머니는 은은한 미소로 먹는 법을 알려준다. 두 손으로 반으로 쪼개서 양념장에 톡톡. 한두 개 입에 쏙쏙 넣다 보니 무려 열두 알이나 먹었다.
날도 맑고 여행 일정도 널널한 날이다. 서울에서도 종종 낮술을 즐기던 버릇 어디 안 간다. 메뉴판을 보니 니우바이지우(奶白酒), 즉 우유 백주라는 묘한 술이 있다. 호기롭게 한 잔 주문했다. 달달한데 신 맛나는 막걸리 느낌으로 안에 흰 쌀알이 들었다.
두부 한 알, 백주 한 입. 또 한 알, 그리고 또 한 입. 슬슬 취기가 오를 때쯤 술이 동이 났다. 가만히 가게 밖을 내다본다. 간간이 들리는 나씨족 방언. 달달하게 떠도는 장미차 향기. 따스한 열기가 내려앉은 봄 낮.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여행이라더니. 낯선 술과 음식으로 또 한 번 오후의 피크닉을 떠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