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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극> 촬영지, 중국을 담은 흙산을 가다

9. 자연이 빚은 ‘원모토림’, 윈난의 웅장함을 만나다

by 리우화
1. 중국의 대자연을 향해 걷다


긴 선잠으로 몸이 찌뿌둥하다.이 놈의 유스호스텔은 방음이 엉망이다.

쿤밍에서 사흘 머무른 숙소는 같은 층에 술집을 함께 운영하는데, 밤이면 젊은 남녀의 헌팅으로 왁자지껄하다.


세수를 하려 거울 앞에 서니 오른쪽 코에서 붉은 피가 툭 떨어진다.

꼭두새벽부터 무리하게 일정을 치른 탓일까.

그래도 피를 쓱쓱 닦고 채비를 마친다. 오늘은 꼭 가고 싶었던 곳을 향하는 날이니.


내가 꽂힌 곳은 윈난 성 추숑미족자치구 원모현에 위치한 ’ 원모토림(元谋土林)’이다.

높은 흙기둥이 숲을 이뤄 중국판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리는 곳이다.

연한 지층이 긴 세월 비바람에 의해 침식되고 깎이며 현재의 절경을 이뤘다.


흙기둥의 높이는 20m 내외부터 40m 이상인 것도 많다.

석림이 웅장함에 압도된다면 토림은 한 폭의 예술을 보는 듯하다는 게 경험자들의 후기다.


아침부터 표를 잘못 예약하는 등 한 차례 곤경을 겪고 쿤밍역 고속열차에 올라탔다.

식사 시간과 겹쳐 열차 안은 고기만두와 우육면 냄새로 가득하다.

중국 고속 열차에는 뜨거운 물을 받을 수 있는 기계가 있어서 파오미엔(泡面, 컵라면)하나씩 손에 들고 타는 탑승객이 많다.


못 다 잔 잠을 자려 눈을 붙이니 이번엔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연신 터져 나온다.

짜증이 솟구쳐 돌아보니 열차 직원이 아주머니 탑승객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다.

알고 보니 이들 직원들은 열차 안에서 지역 특산품을 판매하는데 마케팅 방법이 개그맨에 가까운 입담이다.



그는 내게도 맛 보라며 우유로 만든 딸기맛 캐러멜을 하나 준다.

목축업이 발달된 윈난성은 우유로 만든 밀크티와 치즈, 캐러멜 등이 주요 특산품이다.


방언이 심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我是韩国人(저는 한국인이에요)“하며 손사래 치니 불쑥 손하트를 만들며 말한다.

”유아 쏘 뷰티풀! “ 퍽 촌스러운 멘트에 풉 하고 웃음이 터진다. 방금까지 짜증 났던 마음도 그의 농담에 살살 풀린다.


2. 덥고도 습한 태양 아래, 원모토림



2시간여를 달려 토림이 있는 원모서역에 도착했다. 시골이라 주변에 변변한 식당 하나 없이 조용하다.

피부가 찌르르 타는 듯한 햇빛을 느끼며 역 앞에 늘어선 택시를 탔다.

원모토림까지 가격은 200위안. 성수기에는 500, 600위안까지 치솟는단다.



택시 창가로 내다본 원모현은 죄다 홍토지다.

간간히 있는 가정집도 모두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오랜 세월 미네랄을 함유해 붉어졌다는 게 기사님의 설명이다.

주요 특산품은 양파로 눈에 보이는 밭들이 모두 양파밭이란다.


기사님은 내게 ’ 바이뉘(白女,얼굴이 하얀 여자)’라며 신기해한다.

강한 햇살 탓에 지역민인 기사님을 비롯해 지역 주민들의 피부가 모두 새까맣다.

도로가를 설렁설렁 무리 지어 가는 젖소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원모토림의 입구에 다다른다.



”와, 여기가 중국이라고? “ 차에서 내리자마자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하늘을 뚫을 것처럼 치솟은 흙기둥들이 관광객을 위압하듯 맞이한다.

사람이 조각한 듯 층층이 쌓인 모래성들이 하나의 고대 도시를 이룬 듯하다.


흙으로 형성됐어도 세월의 견고함 만큼은 석림 못지않다.

언젠가 봤던 무협 영화처럼 흰 말을 탄 푸른 무사가 ‘두둥’하는 효과음과 함께 나타날 것 같다.



압도될 정도의 황량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며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강렬한 4월의 햇빛을 받은 토림은 사막 한가운데 선 듯하다.

땀으로 목이 흠뻑 젖었지만 손은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이곳은 과거 한중미 합작 고대 판타지 영화 ’ 무극’이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장동건과 장바이즈가 출연해 부모님 세대에선 유명한 듯하나 찾아보니 평점은 아쉽게도 그닥인 듯하다.



흙은 흙이라고 곳곳에 풀도 있고 꽃도 있다. 흙기둥은 오랜 세월에 쌓이고 쌓여 층층마다 색이 다르다.

어떤 기둥은 다양한 자갈이 하나의 물결을 이루고 있어 고대의 바다를 상상케 한다.

또 다른기둥은 기둥 끝에 크고 작은 돌들이 쌓여 있는데 마치 돌이 기둥에서 자란 듯한 기묘한 광경이다.


이 수많은 기둥들이 이렇게 결코 같은 기둥 하나 없이 각 자의 기품을 뽐내고 있다.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갈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광경에 감탄을 거듭했다.



중국판 그랜드캐니언이라고 하지만 그 표현이 섭하다.

그저, ‘중국의 토림’ 그 자체만으로도 근사한 언어다.


아쉽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은 미세하지만 조금씩 깎이고 있다고 한다.

아주 먼 미래 세대는 이곳을 못 볼 수도 있다고. ‘시절인연’이란 말처럼 결국 ‘시절관광’인 셈이다.


3. “난 우리 정부가 싫어, 이민갈거야!”


옷과 얼굴에 흙먼지를 잔뜩 묻힌 거지 꼴로 숙소에 도착했다.

첫 여행지 쿤밍에서의 마지막 밤. 혼자서라도 소소한 축하주를 해야겠다.


숙소 내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한 남자가 슬금슬금 옆에 앉는다.

꽁지머리를 하고 입술 피어싱을 한 걸 보니 보통 엠지(MZ)가 아니다.

맥주 냄새가 물큰 풍기는 걸 보니 꽤 취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간베이'하며 잔을 부딪치더니 어디 사람이냐 묻는다.


"한국인이에요." "와, 한국인과 중국인은 얼굴을 비교하기 어려워. 얘기나 좀 할까"

(그는 내가 중국어가 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영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30세 지역 은행원인 ’ 랴오닝‘. 과거 스페인에서 유학할 때 한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고.

나중에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로 이직할 생각이 없냐고 묻자 고개를 젓는다.


랴오닝을 비롯한 중국 친구들은 자국민이 미국처럼 개방(开放)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언론이나 예술의 자유가 통제된다는 면에선 중국에서 나고 자란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답한다.


”나는 3년 후엔 중국엔 없을 거야. 가족들과 스페인으로 이민 갈 거거든. “

”갑자기 왜?"

”난 우리나라 대통령이 매우 폭력적(aggressive)이라고 생각해.

온 지역을 제멋대로 통제하려 들거든. 난 그가 싫어. 이 나라에선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 어려워.”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당황한 나는 그저 ’신기한 의견이네 ‘라고 반응했다.

국민 각각의 의견은 다른 게 당연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부에 반하는 의견을 들으니 새삼 신선했다.


그가 유학파인 탓에 정치적 가치관이 유별난 걸까.

그의 대답은 내가 그간 중국인들에게 가졌던 일관된 이미지를 깨기에 충분했다.


잔뜩 취했던 랴오닝은 그 후로 한참 동안 자신이 다녀온 여행지나

다리에 새긴 타투 따위를 자랑하다가

바지에 칵테일을 한가득 쏟고서야 자리를 떠났다.


리우화의 여행지도



[석림(石林)]


말 그대로 ’ 돌의 숲’으로 카르스트 지형으로 형성된 기암괴석의 봉우리들을 만날 수 있다. 윈난성은 수 억년 전 바다의 형태였는데 이후 지각변동으로 인해 바닷속에 있던 바위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며 현재의 석림을 이루었다. 윈난 자연풍경구를 가면 조개껍데기 등 고대 바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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