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봄 햇빛 아래 꽃을 보고 호수를 걷고
1. 중국인의 낭만을 담은, 더우난 하훼시장
쿤밍에는 중국인들도 꼭 가야 할 곳으로 꼽는 관광지가 있다. 바로 아시아 최대 화훼시장인 더우난(斗南) 화훼시장이다.
중국에서 거래되는 생화 10송이 중 7송이가 더우난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중국은 물론 일본, 태국 등 전 세계 50여 개 국가에 꽃을 공급하며 지난해에만 140억 송이가 넘는 꽃이 거래됐다고.
나는 꽃에 큰 관심이 없어 화훼시장은 기존 일정에서 제외했던 터였다.
그러나 “더우난을 안 갔으면 꽃의 도시 쿤밍에 온 게 아니야!”라고
단단히 일러둔 니니 덕분에 아침부터 만두(馒头)를 입에 넣고 더우난으로 향했다.
첫날부터 느낀 거지만 장기 여행에서 엠비티아이 ‘J(계획형)‘는 별 도움이 안 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한 달 전부터 계획한 일정을 하루 만에 바꿔버리니 말이다.
더우난 하훼시장에 들어서자 달콤한 꽃 향기가 바람 불듯 풍겨온다.
입구부터 나를 맞이하는 형용색색의 꽃들에 시장이 아니라 대규모 정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건 꽃 종자 상품이다. 종류만 족히 수 십 가지는 넘어 보인다. 네 팩에 한국 돈으로 2500원.
꽃을 직접 심은 지는 유치원 때가 마지막이었으려나.
애인에게 줄 요량으로 구매하는 꽃다발은 뿌리가 잘려 며칠 새 시들해진다.
힘 없이 거무죽죽 변해가는 모습을 보기 싫어 언젠가부터 꽃 선물을 하지 않았다.
아이디어를 내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다는 의미로 꽃 종자 선물은 어떨는지.
더우난 하훼시장에는 해바라기부터 장미, 인왕화, 수선화, 달리화, 마르가니, 시클라멘 등 온갖 꽃들이 다 모였다.
가격은 꽃 종류 별로 송이 수 별로 상이한데 작게는 5위안부터 25위안까지 이른다. 시든 꽃 하나 없이 모두 막 따온 듯 생생하다.
생소한 꽃 이름을 한 자 한 자 해석하다 지쳐 상인들에게 이름을 묻는다.
누가 봐도 현지인 얼굴에 한자를 못 읽으니 상인들의 표정엔 물음표가 가득하다.
“메이뉘(美女, 젊은 여성을 부를 때 쓰는 호칭), 굉장히 먼 곳에서 온 모양이네요. 어디 지역 사람이에요?”
“한국에서 왔어요.” 내 말에 대만인이나 홍콩 인인 줄 알았다며 신기해한다.
꽃은 선물용으로도 구입하지만 음식 재료로서 쓰이기도 한다.
운남 번화가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씨엔화삥(鲜花饼)은 페스츄리 같은 빵 안에 여러 꽃을 다져서 넣는다.
대표적인 재료는 장미로 한 입 베어 물면 겹겹이 쌓인 붉은 장미잎이 달달하게 씹힌다.
또 석류꽃과 모리화, 유채꽃 등 일부 꽃들은 나물로도 데쳐 먹기도 한다. 신선하고 향긋한 맛이 특징이다.
연초에는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꽃을 선물하기 때문에 더 많은 방문객이 모인다고 한다.
젊은 친구들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손에는 꽃다발을 든 채 사진 삼매경이다.
생화뿐만 아니라 꽃을 활용한 비누나 향수, 목걸이, 귀걸이 등 다양한 상품들을 만날 수 있다.
시장 방문객들은 행복한 미소로 양손에 꽃을 한 아름 안고 시장을 나선다.
청두에서 온 니니처럼 다들 누구에게 사랑을 전하러 가는 걸까?
커다란 꽃 밭에서 후회 없이 향기를 간직하고 시장을 나섰다.
오늘은 매일 뿌리던 향수를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2. 쿤밍에서 누리는 푸른 여유, 취호
이날 쿤밍의 날씨는 30도는 훨씬 웃도는 화창한 날씨였다.
아무래도 초봄이니 고집스럽게 입었던 후드 집업을 벗었다.
아무래도 광합성을 만끽하지 못하면 종일 후회할 날이다.
윈난은 사계절이 따뜻하지만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4월부터다.
꽃이 만개했을뿐더러 나돌아 다니기에도 덥지 않다.
더우난 화훼시장에서 지하철 1시간을 이동하면
쿤밍 최대 규모의 시민공원인 취호(翠湖)가 있다.
비취색의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 붙어진 이름으로 총 4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섬은 모두 다리로 이어져 이동하기 어렵지 않지만
상당히 넓기 때문에 모두 둘러보려면 반나절이 걸린다.
시민들의 공간이란 점은 서울의 한강과 비슷하다.
아이의 양손을 잡은 부모, 화관을 나란히 쓴 젊은 남녀, 휠체어를 타고 온 노부부.
따사로운 봄볕 아래 미소가 가득하다.
차이점은 취호는 좀 더 관광지에 특화됐다.
취호 안에 죽림원이나 생태문명전시장, 사원, 연못 등 여러 둘러볼 곳을 마련해 놨다.
시간이 된다면 통통배를 타고 비췻빛 호수를 유랑하는 것도 좋다.
밀크티 한 잔을 포장해 조용한 오후를 즐기고 있는 백족 노부부 뒤에 앉았다.
강 건너편엔 오리들에게 밥을 던져 주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평일의 여유인가.
매일 압박감에 불현듯 숨이 가빠져 왔던 기사 마감 시간 오후 4시.
그 시간만 넘어가면 상사들의 업무 독촉 메시지가 무섭게 울리곤 했다.
문득 마음의 여유란 게 그리 어려운 단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호수를 거닐며 좋아하는 노래와 밀크티 한 잔이면 충분한 것을.
평일이고 주말이고 기사거리를 찾느라 분투했던 지난날들이 생각났다.
열정적인 기자가 되고 싶었고 흠 없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완벽’에 대한 강박은 언젠가부터 행동거지를 얽매기 시작했다.
조금 미숙하고 살짝 서툴더라도 괜찮았는데. 완벽하지 않아도 내 삶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이리 나를 몰아붙이기만 했던 걸까.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조지아의 대사가 떠오른다.
”저는 제 삶을 조용히 너무 많이 낭비했어요.
머리를 숙이고 헤치고 또 헤치고 그럼 어느 날 궁금해하죠.
’내가 심지어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봐요, 우리가 많이 신경 쓰는 일들 어떤 것들은 별 쓸모가 없어요.”
취호에서 한 번도 안 걸어본 사람처럼 무려 세 시간이나 돌아다녔다.
밀크티를 다 마시면 또 다른 맛의 밀크티를 사서 마셨다.
나중에 숙소에 돌아와 보니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오십 원 동전 만한 물집이 생겼다.
문득 그게 우스워 속으로 킥킥 웃었다. 발이 아프면 그냥 숙소로 돌아오면 될 것을.
조금 발이 쓰라려도 후회 없이 봄 햇살을 누렸으니, 이만 됐다.
리우화의 여행지도
[원통사(圆通寺)]
쿤밍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사찰, 원통사. 당나라 시대에 지어진 원통사는 당대의 고대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곳입니다. 커다란 연못을 중심으로 원통보전과 천왕전, 팔각정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원에서 절밥 체험도 해볼 수 있고 시간을 맞춰 가면 승려들이 한 공간에 모여 불경을 외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으니 한 번쯤 가보길 꼭 추천드립니다.
[윈난기의기념관(云南起义纪念馆)]
취호 근처에서 우연하게 방문한 기의 기념관. 운남 출생의 애국민주주의자라 불리는 노한의 개인사저와 같은 용도로 사용됐던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