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중국 쓰촨 청두에서 매콤한 하룻밤
1. 다정함을 사랑하는 이유
아빠는 늘 말했다. "친절한 남자는 조심해라. 아무 이유 없이 잘해주는 남자는 없어." 여자로 태어난 이상 항상 다정함을 경계하며 살아야한다면서.
그 때문일까. 내 전 애인들은 모두 '아빠 같은' 사람이었다. 감정 없는 로봇처럼 눈빛이 서늘했다. 난 한 번 사랑하면 민들레 홀씨처럼 온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이라, 모든 연애는 꼭 나만 울고 끝났다.
누군가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면, 마음 어딘가에선 슬쩍 가시가 돋았다. ‘진심일 리 없어.’ 아빠의 당부가 귓가를 스칠 때면 나는 한 두 걸음 뒤로 물러섰고, 그들 역시 고개를 갸웃이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아빠는 알았을까. 차가운 아빠 밑에서 자란 딸은, 다정한 사람 앞에선 늘 속절없이 무너지는 사람이 됐다는 걸. 그리고 그가 내게 진심이란 걸 알게 되는 순간, 마음은 여름날 손에 쥔 솜사탕처럼 빠르게 녹아버린단 걸.
그러니까 그해 봄, 중국에서도.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과 이별한 뒤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내게도.
여름날 햇살 같은 온기를 담아 내 이름을 불러주던 사람이 있었다.
2. 기차에서의 재회
"流化。"
(우화야.)
중국 운남성 샹그릴라에서 쓰촨성 청두(成都)로 가는 아침 기차 안. 고개를 돌려보니 지하오가 빙긋 웃으며 간식이 든 비닐봉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지하오!" 나는 한껏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하오는 중국 운남성 리장의 호도협(虎跳峡)에서 처음 만났다. 후난성 출신인 그는 마카오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다. 봄방학을 맞은 여동생과 함께 다리(大理)를 여행하다가, 여동생이 싱가포르로 돌아간 뒤에는 나와 함께 쓰촨을 여행하기로 약속했다. 나이는 03년생, 스물셋이다.
"13시간 동안 기차를 타야 하는데, 침대 좌석이 모두 나가서 아쉽다. 자다 깨다 하다 보면 금방 도착할 거야. 일단 내가 짠 여행 루트부터 보여줄게."
지하오는 핸드폰 화면으로 여행 다니며 틈틈이 짰다는 일정표를 보여줬다. 청두 판다 번식연구기지 (成都大熊猫繁育研究基地)부터 무후사(武侯祠), 청두 고대 거리 송현방고진(宽窄巷子, 콴자이샹즈)까지.
"박물관 입장권 예약은?" "내가 다 했어." "주말이라 식당에 사람 많을 텐데." "식당 예약도 다 했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씩 지어 보인다.
장기 배낭여행은 대게 여행지만 정해놓고 구체적인 루트는 전날이나 당일에 정한다. 그러니 현지인인 지하오의 동행 제안은 '럭키'였다. 여행지도 언어도 음식도, 모두 만사 해결이니까. 그런데 이렇게까지 완벽한 여행 일정을 짜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넌 외국인이잖아. 이런 건 중국인인 내가 책임져야지. 우화, 넌 그냥 나를 따라오기만 해."
"진짜 고마워. 사실 쓰촨은 계획에 없던 여행지라 막막했는데, 너 덕에 나 살았다."
"있잖아, 나는 이번 여행이 정말 기대돼. 일단 너를 다시 만나 대화하고 싶었어."
"나를, 왜? 난 중국어가 능숙하진 않아서 우리 대화도 잘 안 통했잖아."
"네가 내 말을 다 이해할 필요 없어. 내가 조금 더 천천히 말하면 되니까."
지하오는 내 자리에 간식을 내려놓고 자신의 좌석으로 돌아갔다. '너를 만나 다시 대화하고 싶었다'...나는 그의 문장을 천천히 읊조리며 좌석에 앉았다. 창밖으로 완연한 봄빛이 스며든 초록 물결이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3. 이젠 시티투어는 싫어
밤 9시가 다 되었을 무렵, 쓰촨의 성도 '청두'에 도착했다. 오지에 가까운 운남성과는 전혀 다른 도시 풍경에 우린 둘 다 헤에- 넋을 놓았다. 화려한 빌딩과 세련된 패션의 사람들. 도시 한복판, 휘황한 불빛 사이로 강남이 겹쳐 보였다.
우린 청두 중심가의 유스호스텔을 찾았다. 머리를 화려하게 볶은 카운터 직원이 내 여권을 확인하고 방키를 줬다. 숙소 라운지에서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고 있던 젊은 이 몇몇이 낯선 한국어에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12인이 함께 쓰는 방문을 열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부시게 치장한 중국 여성들이 나를 동시에 쳐다봤다. 중국 특유의 진한 화장, 개성 있는 옷차림, 프로럴 향. 매운맛처럼 뜨거운 쓰촨의 밤을 즐기러 온 여자들이다.
"나, 나름 서울에서 왔는데. 한국 깡촌에서 온 줄 알겠다."
운남을 여행하며 꼬질 강아지가 된 나는 하릴없이 치마를 탁탁 털었다. 운남의 드넓은 초원과 검은 야크들, 비취색 호수가 눈물 나게 그리웠다. 거긴 오히려 꾀죄죄하게 다니는 게 자연스러운 곳이었다.
남 눈치 안 보고 자연에 스며들듯 여행하는 '기안 84'를 닮은 내겐 시티투어는 이젠 결이 맞지 않는단 걸 알았다.
"나도 운남성이 좋아. 천천히 걷고 느리게 여행하는 곳이잖아. 시티투어는 근사하긴 하지만, 사실 언어만 다른 서울이고 베이징이고 도쿄지. 이모이양(一摸一样, 모두 똑같다)이야.
그래서 이곳저곳 여행 다니는 게 중요해. 자신에게 맞는 여행 취향을 알고, 그에 따라 다음 여행지를 고를 수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여행지라고 해서 내가 꼭 가야 할 필요는 없어. 여행은, 내 행복을 찾으러 가는 거니까."
스물셋이 말을 제법 하는데. 슬쩍 놀리자 지하오는 이를 환히 내보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4. 매콤한 '훠궈' 데이트
우린 밤 11시가 다 됐을 무렵 숙소를 나섰다. 운남에서부터 내가 노래를 불렀던 '허궈'를 먹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녀석, 아까부터 표정이 장난스럽다. 뭔가 대단한 일을 꾸민 것처럼 실실 웃는다.
"중국 쓰촨의 진짜 훠궈를 먹고 싶어?"
"당연이지. 사천 훠궈를 먹기 위해 내가 여행 일정도 바꾼 거잖아."
"우화, 나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 있어?"
겁을 잔뜩 주는 걸 보니, 정말 엄청 매운 건가?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하오는 내 다짐까지 받아내며 택시를 잡았다.
번화가 골목의 한 허궈집. 그런데 식당 벽면에 붙은 훠궈 포스터가 심상치 않다. 폴짝폴짝, 물컹물컹. 뜨악해진 나는 얼어붙었다. 여긴, 개구리훠궈 전문점이다.
재료도 채소류와 열댓 마리의 개구리가 전부다. 훠궈의 뜨끈한 홍탕에서 매끈한 속살을 드러낸 채 반신욕 하듯 앉아 있는 개구리들. 머리만 없고 팔, 몸통, 다리가 고스란히 붙어있다. 먹는 법도 별 게 없다. 개구리 한 마리를 입에 넣고, 안에서 뼈를 바른 후 툭 뱉는 것.
처음으로 이런 곳을 데려 온 지하오가 야만스럽게 보였다. 문화 차이가 살결에 느껴지자 사람에 대한 거부감마저 느껴졌달까.
벌써 세 마리째 발골 중인 지하오를 찡그리며 쳐다보다가, 나도 마지못해 조그만 녀석을 집어 들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내게 어려운 일이 뭐가 있어. 뭐든지 부딪혀보는 거지. 눈 꼭 감고 통째로 입에 넣었다.
..... 어라, 이거 왜 맛있지? 닭고기보다 부드럽고, 생선보다 촉촉하다. 잔뼈는 많지만 생각보다 속살도 푸짐하다. 개구리들이 위장에서 옹기종기 폴짝이는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손이 안 멈춘다.
"사실 처음엔 좀 야만적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역시 뭐든 직접 먹어보고 경험해야 하나 봐."
"거봐,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건 별 거 없어. 직접 경험해 보고 좋았으면 된 거야.
근데 너 나보다 개구리 더 많이 먹은 거 알아?"
알고 보니 훠궈는 중국 현지에서 꽤 로맨틱한 음식으로 통한단다. 하나의 뜨거운 냄비를 사이에 두고 서로 재료를 건져주며, 따뜻한 온도와 매콤한 향신료 속에서 진해지는 감정. 그게 하필, 우리 사이엔 개구리인 게 옥에 티이긴 하지만.
그날 우린 새벽 늦게까지 개구리훠궈를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청년 공산당에 왜 들어갔는지, 마카오 마라톤은 왜 참가했는지. 코스프레를 좋아하는 여동생 이야기. 꼭 가보고 싶다는 일본 후지산 얘기까지.
지하오는 앞치마를 매 주고, 고기를 건져 그릇에 덜어주며 나를 살뜰히 챙겼다. 내가 중국어로 말할 땐 가만히 귀 기울여 들었고, 모르는 걸 물어보면 나중에 보기 쉽도록 한자로 정리해 메세지로 보내줬다. 기분이 좋을 땐 이를 환히 내보이며 10대 소년처럼 웃었고, 종종 나를 웃기려 우스꽝스런 표정도 지어보였다.
두 여동생 덕분일까. 스물셋, 아직 철없어도 될 나이의 그에겐 어딘가 깊은 다정함이 있었다. 내가 예전 연인들에게서 기대했던, 사람이 사람을 진심으로 마주할 때 묻어나는 그런 다정함이.
나보다 어린 그에게 무슨 연애 감정이 있겠냐마는. 그의 조용한 다정함에 나는 아주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다정함을 경계하면서도 그 앞에 가장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라서. 심지어 그게, 이 낯선 땅 이방인일지라도.
청두에서의 첫날 밤, 매콤한 개구리훠궈의 잔향이 은은하게 테이블에 남았다.
리우화의 '맛' 여행지도
이름만 들어도 "나 그거 알아!" 하는 중국 사천요리들,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진정한 매운맛의 고장, 중국 쓰촨성(四川)입니다. 사천요리는 광둥요리, 산둥요리, 화난요리(후이양요리)와 함께 중국 4대 전통 요리 중 하나로 꼽힙니다.
'사천요리'는 중국에서 대중 요리 시장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백 가지 음식에 백 가지 맛'이라는 백채백미의 칭호를 갖고 있으며, 그만큼 사천요리의 역사는 길고 풍미가 다양합니다.
마(麻): 혀를 얼얼하게 만드는 화자오(花椒, 산초)의 매운맛
라(辣): 얼큰하고 불 같은 매운맛, 건고추(干辣椒)나 고추기름 등에서 나옴
가장 대표적인 맛은 '마'와 라'로 이들이 합쳐지면 우리가 아는 '마라(麻辣)' 가 됩니다. 중국 향신료로 잘 알려진 라조장(辣椒油, 라유), 두반장(豆瓣酱)도 이곳 쓰촨이 고향입니다.
사천 현지인들은 마라 음식을 일상처럼 즐깁니다. 우리나라에선 값비싼 훠궈, 사천에선 부대찌개나 된장찌개처럼 집밥으로 먹죠. 청두박물관에 따르면 한나라, 진나라 시절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매운맛을 사랑했다고 하니, 속칭 ‘맵수저 유전자’도 역사 깊은 셈입니다.
우리가 먹는 사천요리는 현지와 비슷할까?
아쉽게도, 우리가 익숙한 ‘사천요리’의 맛은 현지 요리와는 조금 다릅니다. 한국에서 흔히 접하는 마라탕, 마라샹궈, 마파두부는 ‘마(麻)’보다 ‘라(辣)’ 중심의 맛으로 재해석된 경우가 많습니다.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톡 쏘는 산초(산자오)와 화자오(花椒) 향은 빠진 채, 칼칼하고 깔끔한 매운맛 위주로 조리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우리가 먹는 마라 요리는 사실상 쓰촨보다는 후난(湖南)의 칼칼한 매운맛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라탕 열풍이 불면서 중국 쓰촨성 '식도락'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다만 사천 사람들, 아침에도 마라탕 먹는 사람들이니 만만하게 봤다간 큰 코 다칠 수도 있어요! (불닭 볶음면도 심심한 사람들)
훠궈에 들어가는 특이 재료들
오늘 제가 사진 공격(?)을 해드린 개구리훠궈. 우리나라에선 개구리만 없을 뿐 훠궈는 유명한 요리입니다.
예로 우리에게 익숙한 하이디라오가 있죠. 1994년 중국 쓰촨성의 시골 지역 젠양에서 시작한 작은 허궈 가게가 지금의 중국 1위 프랜차이즈 허궈 브랜드가 됐답니다.
훠궈는 한 끼에 들어가는 재료만 열 가지가 넘습니다. 현지 허궈에 들어가는 식재료는 흔히 아는 고기나 야채류 외에도 아래와 같은 재료들이 들어갑니다.
-우뇌(牛脑花): 소의 뇌. 부드럽고 크리미한 식감.
-우심(牛心), 우간(牛肝), 우위(牛胃): 각각 소의 심장, 간, 위(천엽 포함).
-돼지대창, 소곱창, 껍데기: 향신료와 어우러지면 잡내 없이 씹는 맛이 강한 특수 부위들.
-개구리(田鸡): 부드럽고 담백한 고기로 중국 요리에서 흔히 쓰이는 재료 중 하나.
-선지(血旺): 피를 굳힌 형태로, 마라 육수에 담그면 독특한 풍미를 냄.
국내에선 훠궈 전문점 자체가 적어 몇몇 브랜드나 프랜차이즈가 독점적으로 허궈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희귀 재료 탓에 가격도 1인 5만 원을 훌쩍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하이디라오는 평일이고 주말이고 사전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매 저녁 대기줄만 50~100팀이 넘어갑니다. 하이디라오 영업시간이 새벽 3시까지인 이유가 있죠.
오는 주말, 뜨거운 여름을 더 화끈하게 만들어 줄 허궈와 함께 로맨틱한 저녁 한 끼는 어떠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