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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엔 중국 판다로 태어날래

29. 비 내리던 쓰촨성 청두 '판다번식기지'에서

by 리우화
1. 판다 보러 가자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창가 너머로 온 세상이 희뿌옇다. 짐을 챙겨 숙소 1층으로 내려갔다. 일찍 준비를 마친 지하오가 날 보며 싱긋 웃었다. 폭우에 눅눅해진 기분이, 그의 맑은 미소에 금방 개인다.


우린 숙소 앞 노점에서 갓 찐만두(馒头)와 따끈한 도우쟝(豆浆)을 샀다. 그리고 인도 가장자리에 나란히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직장인들은 물웅덩이를 참방참방 건너고, 스쿠터로 아이를 등원시키는 엄마들은 신문지로 아이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영 비가 그치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 판다는 다음에 볼까?" 지하오의 조심스런 물음에 나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판다 도시, 청두(成都)에서 판다 못 보면 여행자 자존심에 스크래치지.


"하늘이 무너져도 갈 거야." 고집 섞인 내 말에 그는 두 손 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도우쟝을 손난로처럼 내 두 손에 감싸 쥐며 말했다. "아무리 추워도 후회하기 없기야." 도우쟝의 온기가 손 끝에 전해지는 걸 느끼며 살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적인 중국 아침 식사인 만두와 도우쟝, 아침 노점상에서 흔히 구매할 수 있습니다.
쓰촨 청두 판다번식기지는 청두 중심가에서 지하철로 약 1시간이 걸리는 곳에 있습니다.


2. 대나무 숲에서 만난 자유


청두판다번식기지(成都大熊猫繁育研究基地)
1987년에 지어진 중국 쓰촨성 청두 '판다번식기지' 는 멸종위기에 처한 자이언트 판다와 레서판다의 보호·번식·연구를 위해 설립된 비영리 연구기관입니다. 단순한 동물원 형태가 아니라 야생 복귀 프로그램, 인공 번식 연구, 환경 교육을 모두 진행하는 전문 기관입니다.


철창 가득한 동물원을 상상하고 왔건만. 끝없는 대나무 숲만 가득 펼쳐져 있다. 어떠한 배경 음악도 없다.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도, 오색찬란한 캐릭터 풍선도 없다. 빗줄기가 연못을 톡,톡 두드리는 맑은 소리만이 고요를 채웠다. 풋풋한 대나무 향은 은은하게 숨결에 닿았다.


"나, 판다의 집에 초청받은 손님같아."

"여긴 판다들이 본래 살던 터전을 최대한 닮게 재현한 곳이야. 판다들에게 최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몇 년 전, 대전의 유명 동물원을 취재 간 적이 있다. 시멘트로 이뤄진 작은 철창, 인테리어라고 놔둔 생기 없는 풀들,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정형 행동을 보이던 동물들. 아이들의 공허한 눈빛에 한 동안 유리창 앞을 떠나지 못했다.


"모든 동물이 이런 곳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감옥처럼 좁은 철창에 사는 동물들이 너무 많아."

"윈난성 들판에서 뛰놀던 야크들 기억나지? 인간이 동물과 어울려 사는 존재가 아닌 구경꾼이 될 때, 그들의 자유는 묶여버려. 우리도 판다 기지가 아니면 다른 동물원은 모두 똑같아."


대나무 숲을 얼마나 걸었을까. 길 중간에 옹기종기 모여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관광객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판다다! 나는 지하오의 손을 잡아 끌고 그들을 향해 팔랑팔랑 뛰어갔다.


3. 포근포근, 말랑말랑, 부숭부숭



"...토토로?"


인생 첫 판다를 만난 내 소감은 이랬다. 메이가 처음 토토로를 만난 곳도 나무 아래 풀 숲 동굴이었지. 푹신푹신한 배, 야무지고 말랑한 발, 쫑긋 솟은 앙증맞은 귀, 둥그런 두상. 검정과 흰색으로 칠해진 단순한 동물 하나가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단잠에 빠져있다. 푸릉, 푸릉- 숨소리 따라 뱃살이 꿀렁인다.


"판다들은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잔대. 일어나면 대나무를 뜯어먹고, 다 먹으면 또 자고. 신생아나 다름없어."


곤히 잠든 아기 토토로를 지나니 이젠 눈이 닿는 곳마다 판다가 있다. 대부분 관광객이 잘 보이는 자리에 철퍼덕 앉아 대나무를 씹거나 고롱고롱 잠을 잔다. 마음 같아선 널따란 품에 와락 안기고 싶지만 이들도 엄연히 '맹수'다.



엉금 엉금



와작 와작



오독 오독


뚠뚠한 몸에 가득한 귀여움. 야무지게 대나무를 뜯는 손갈퀴와 여유로운 미소까지. 몇 마리 보고 나니 살짝 코웃음이 났다. 상팔자가 바로 '판다팔자'다. 강아지야 집도 지키고 애교도 피우는데 판다들은 평화로운 대나무 숲에서 온종일 먹고 자면 그만이다.


"다짐했어. 다음 생엔 판다로 태어날 거야."

"왜?"

"하루종일 먹고 자는데 온 국민에게 예쁨 받잖아. 삶의 유일한 고민도 '내일 대나무가 잘 자라 있을까' 뿐이고. 무럭무럭 자라기만 해도 잘했다고 칭찬받을 걸."


고롱고롱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잘 자라기만 해도 외교 사절로 해외에 나가고, <쿵푸팬더>같은 영화배우도 시켜준다. 코피 터져라 수능 공부하지도, 취업문 넘으려 불안에 떨지도, 돈에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다.


이들 사회엔 경쟁도 비난도 없다. 그저 유유자적하게 폭신한 대나무 잎 침대에 누워 제 삶만 챙기면 그만이다.


4. 판다로서의 삶은


"너, 판다가 멸종위기종이었던 거 알아?"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지하오가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 지금은 보호 활동 덕분에 개체 수가 서서히 늘었지만, 한때는 1000마리도 안 남아 ‘멸종위기 1급’으로 지정됐다. 대나무 숲이 농경지·도로 개발로 줄어든 까닭이다.


"판다로 살면 편하고 좋지. 근데 무섭지 않아? 내가 멸종될지도 모르는데, 그 사실을 영원히 몰라.


이 판다 마을 밖에서 사는 판다들은 지금도 사라져 가는 대나무들을 평생 좇으며 살아가. 우린 하마터면 판다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몰랐을 수도 있어."


판다들의 검정 테두리 안 맑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온순한 눈빛 사이 미처 보지 못한 고통이 있었다. 인간의 욕심으로 뺏겨버린 삶의 터전과 그에 박탈당한 자유가 두 눈에 스며있었다. 바보같이, 눈에 보이는 모습이 저들의 삶의 전부라고 착각했구나, 나는.


"인간으로 살기 벅차고 힘들지. 근데 판다처럼 대나무만 걱정하고 살아도 고통스러운 인생인 걸. 그래도 다음 생에 판다로 태어나고 싶어?"


지하오의 물음에 울타리 너머 열심히 대나무를 뽑고 있는 판다를 쳐다봤다. 맛난 대나무를 발견한 듯 푸릉푸릉 대며 자리에 풀썩 앉던 아이.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온종일 대나무 먹는 삶은 궁금하긴 한 걸. 인간으로서의 삶은 또 경험해보고 싶지 않아."

"그럼 우화, 너는 다음 생에 판다로 태어나. 나는 네가 멸종되지 않도록 대나무로 태어날게."


지하오의 능청스런 멘트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다음 생엔 난 판다, 넌 대나무로 태어나자. 세상 일에 아프지 말고 빗소리 가득한 깊은 숲에서 함께 살자. 소리 없이 멸종이 다가와도 마지막 순간엔 결코 외롭지 않게.


"콰아, 콰아-" 멀리서 판다 우는 소리가 들렸다. 판다 울음소리가 생각보다 거칠고 우렁차단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리우화의 여행지도


중국 쓰촨 청두는 왜 판다를 대표하는 도시가 됐을까요? 자이언트 판다는 중국 쓰촨성, 산시성, 간쑤성 일부 산악지대에만 살아요. 그중 쓰촨성 북서부의 대산맥과 대나무 숲이 판다의 주 서식지였답니다. 그래서 중국의 상징이나 외교 사절인 판다도 대부분 쓰촨성 청두 보호센터 출신입니다. ‘판다 임대’ 계약도 대부분 청두 연구기관과 이루어집니다.


1980년대 이후 판다 개체 수가 급격히 줄며 중국 정부는 청두에 '판다 번식기지’를 세웠어요. 여기서 인공 번식, 건강 관리, 야생 복귀 훈련 등을 체계적으로 진행했고 개체 수 회복이란 성과를 거뒀답니다. 현재 청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판다 개체를 관리·보호하는 도시 중 하나예요.



판다 번식기지에서는 판다 외에도 긴 꼬리와 붉은 털을 가진 레서판다(小熊猫)도 만날 수 있답니다. 추가로, 우리의 푸바오는 이 곳이 아닌 쓰촨성 워룽중화자이언트판다원 선수핑기지에 있다고 해요. 해발 1700m 고지에 위치한 판다 보호구역으로 통나무 평상과 연못 등이 조성된 야외 방사장에서 생활하고 있답니다.



청두 시내 곳곳에선 판다 조형물, 판다 굿즈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청두 지하철엔 무려 판다 테마 열차도 다닌답니다. 특히 푸바오를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분들께, 올 여름 여행은 판다의 도시 '청두'는 어떠신가요?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대나무를 아삭아삭 씹어 먹는 소리로 가득한 대나무 숲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지하오가 판다기지에서 사 준 '호박판다', 곧 좋은 일이 생길거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귀여우니까 오늘의 마지막 인사는, 판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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