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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청춘의 초록, 청두 두장옌

30. 수양버들, 오카리나 그리고 차(茶) - 중국 쓰촨성 청두(2)

by 리우화
1. 내가 사랑했던 초록


한 나라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베트남 야시장에서 먹은 달큰한 망고,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청명한 바다, 일본에서 맡은 산뜻한 벚꽃 향. 그 기억들은 문득 봄바람처럼 불어와 우릴 미소 짓게 한다.


내겐 중국 청두가 그랬다. 도시를 물들인 단정한 초록을 사랑했다. 찬란한 햇빛에 은은히 스며든 차(茶) 향과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는 수양버들, 거리마다 들리는 청량한 오카리나 소리를.



청두의 초록은 한 사람으로 인해 더욱 짙어졌다. 윈난성 리장 호도협에서 우연히 만나, 별하늘을 함께 바라보다 쓰촨성까지 여행을 함께한 사람, 우지하오.


여행지에서 만났다는 설렘 때문에 착각처럼 좋아해 버린 걸까. 또래 이방인을 향한 가벼운 호기심이었을지라도, 나는 그의 색에 시나브로 스며들었다.


소통이 안돼 대화가 엇갈릴 때도, 낯선 서로를 이해 못 할 때도 있었지만. 그의 한 없이 다정한 말투와 장난기 어린 웃음,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던 세심함에 열여덟처럼 설렜던 봄이었다.


그 모든 여행 추억들 중 청두의 초록이 유독 선명한 이유는, 날 보며 환히 웃던 그 사람이 가득 물들어 있기 때문일까. '고마워' 이 기록을 남기며 작게 읊조려보는 애틋한 인사.


2. 꽃차, 수양버들, 오카리나


중국 청두 두장옌 근처 고대거리 풍경


“청두는 골목마다 차 향이 가득해. 막 끓인 꽃차의 잔향이 남아 있어.”


두장옌 근처 고대(古代) 거리. 차 문화가 발달한 청두답게 골목마다 찻집이 늘어서 있었다. 녹차, 바이차, 황차, 우롱차, 홍차…. 각각의 향이 도자기 주전자 속에서 달그락대는 소리와 함께 은은히 공기 중으로 퍼졌다.


"중국은 커피보단 차를 좋아하니까. 막 끓인 차 향을 맡았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지하오가 한 가게에서 팔고 있는 녹차 잎을 집어 내 코에 갖다 댔다. 처음으로 향에도 녹음이 진단 걸 알았다.


“커피가 잠을 깨우고 일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마신다면, 차는 비로소 여유를 갖기 위해 마신달까.”

“우화, 넌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 차가운 커피는 여자 몸에 그리 좋지 않아. 중국에 있는 동안에는 따뜻한 차를 많이 마시며 건강을 잘 챙겨.“



중국 청두는 고대 중국의 한복판에 들어선 듯했다. 거리에 늘어진 수양버들이 비 젖은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거문고 소리는 잔잔한 음표를 따라 거리를 채웠다. 하얀 시녀옷을 입고 사뿐사뿐 걷는 여성들, 오색빛 가면을 쓰고 막 변검(變臉) 공연을 마친 우락부락한 남성들도 눈에 띈다.


중국 배낭여행을 다니며 도시마다 위치한 고대 거리 걷는 걸 가장 좋아했다. 서울의 경리단길, 경주의 황리단길 같은 곳이다. 붉은 전등이 수놓은 거리엔 쓰촨 고유의 특색이 가득하다. 청두를 상징하는 귀여운 판다 장식품들을 지나치면 오리머리와 토끼몸통 등 아찔한 거리 음식도 눈에 띈다.


가게 벽면에 나열된 나무칼들을 손 끝으로 훑다가, 비로소 '동방의 거인' 중국에 서 있단 걸 체감한다. 수 천년을 쌓아 온 장대한 역사와 고유의 미학이 살아 있는 문명. 시안(西安), 베이징(北京)에선 중국의 거대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면, 청두는 차와 변검 등 문화적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우린 골목에 기대 나무피리를 불고, 마라소스가 잔뜩 묻은 죽순을 나눠먹고, 아기자기한 판다 인형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악기 가게의 젊은 여성이 오카리나를 호호 불다 아이들처럼 뛰어다니는 우릴 보곤 눈웃음을 지었다.


우린 따뜻한 밀크티를 사서 벤치에 앉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 앞엔 한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떨어지는 수양나무 잎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지하오는 푸른 잎 하나를 주워 내 손에 쥐어주었다.


"청두는 옛날 중국에 멈춰서 있는 것 같아. 어떤 계절에 와도 차 향이 가득하고 피리 소리가 들리겠지."

"청두의 매력에 푹 빠졌구나. 그럼 여름에도 오고 가을에도 오고 겨울에도 와. 모든 계절에 청두를 찾아와."



"하지만 넌 다시 청두에 오지 않을 거잖아."

"청두에 오면 연락해. 곧 선전(深圳)에서 일할 예정이니 바로 고속 열차 타고 갈게."


문득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지하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너는 나를 기억할까?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서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날도 올 거야."


그는 고작 네 살 많은 누나의 철없는 조언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넌 여행하다 만났잖아.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는 내게 '一生难忘(평생 기억 될)' 사람."


아, 누군가에게 영원히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건. 벅차오를 정도로 설레는 일이란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벌게진 마음을 숨기고자 그의 '一生难忘'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며 웃었다.


나는 알았다. 찰나가 영원이 될 수 없듯이,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결국 잊히리란 걸. 이 여행이 끝나면 서로를 몰랐던 때처럼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리란 것도.


그러니 지하오, 우린 왜 타국의 이방인으로 만났을까. 같은 한국인이었다면 기약없는 여행을 했을텐데. 오늘 함께한 하루가 순간마다 행복해서, 여행 후에도 너를 그리워할까 문득 두려웠다.


훗날 청두의 초록을 떠올릴 땐, 네가 꼭 기억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 두장옌(都江堰)과 푸른 강



청두에도 밤이 찾아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수리(水利) 시설, 두장옌을 찾았다. 야경을 즐기러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라이브방송을 하는 이부터 손오공 분장을 한 사람, 고대 선녀 옷을 입은 사람 등 고요했던 거리가 사람들의 목소리로 차오른다.



다리 밑을 쳐다보니 수 천년 역사가 무색하리만큼 거대한 폭포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른다. 강은 눈으로 보면 맑은 초록인데 핸드폰으로 촬영하니 투명한 푸른빛을 띤다.


다리 주변으론 여러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술기운 오른 얼굴로 맥주를 기울이는 아저씨, 아이 손을 잡고 산책하는 엄마, 다리를 배경으로 서로를 찍어주는 커플들. 화려한 건축물이나 웅장한 풍경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민들의 단란한 저녁밤이다.


밤하늘을 붉게 물들인 풍등 아래, 우리도 손을 잡고 다리를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우린 많은 부분이 달랐지만 영화 취향만큼은 똑같았다. 90년대 홍콩, 일본 영화를 좋아했다. <러브레터>, <아비정전>, <이이> 같은 작품들을. 우린 무선 이어폰을 나눠 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중경삼림> OST '몽중인'을 들었다.


귓가로 들려오는 경쾌한 리듬을 느끼며 그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이 여행이 끝나는 날, 우린 결국 이별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훗날 이 유한한 만남을 후회할 지라도, 그 날의 나는 그 떨리는 감정을 놓치기 싫었다.


두 볼을 스치는 서늘한 봄바람, 하늘을 푸르게 비추던 두장옌, 손 끝에 느껴지던 따스한 온기. 내 생애 가장 사랑스러운 청춘이었던, 중국 청두의 밤.



我 彷 似 (足)根 你 熱 戀 過
나는 당신과 열애를 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고
和 你 未 似 现 在 这 槎 近
당신과 지금처럼 가까왔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夢 中 人 這 分 鐘 我 在 等
꿈속의 그대, 이 순간을 난 기다려요.
來 製 造 心 裏 興 奮
내 마음속에 설렘을 만들어주기를

/왕페이 - 몽중인(夢中人)

2025.04 지하오가 카메라로 담아 준 스물일곱의 나.



리우화의 여행지도


중국 청두의 맑고 청초한 매력을 고스란히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제 표현력이 부족해서 아쉬울 따름이에요. 무비자 정책으로 핫플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청두! 꼭 가 봐야 할 여행지와 먹거리를 정리해 볼게요.


[두장옌(都江堰)]

두장옌은 청두를 대표하는 관광지입니다. 무댐(無壩) 관개 시스템으로 기원전 256년경 진나라 시기에 건설됐습니다. 무댐 방식이란 일반적인 댐처럼 강을 막지 않고 강줄기를 갈라 흐름을 조절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쓰촨 평야를 ‘천부지국(天府之國, 하늘이 내린 땅)’이라 부르게 한 농업의 기반으로, 민강의 물을 ‘내강(內江, 농업용수)’과 ‘외강(外江, 홍수 배출)’으로 나눠 홍수를 방지하면서도 농업에 물을 공급합니다. 2000년 넘게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청두 두장옌 근교 고대 거리에선 전통 찻집, 수공예품, 거리 공연(변검) 등을 즐길 수 있습니다. 청두의 특색을 담은 기념품과 특산품도 다양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두장옌 근처에는 울창한 나무가 푸른 숲을 이룬 칭청산(青城山, Mount Qingcheng)도 있습니다. 두장옌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 사찰과 신선들이 머물던 전통 건축물 구경 가능합니다.


[싼씽뚜이(三星堆) 박물관]

중국 역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실만 한, 청두 싼씽뚜이 박물관입니다. 싼씽뚜이는 기원전 2800~1100년 경 상나라 이전 시기의 유적지로 중국 남방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곳입니다. 고대 쓰촨 문화의 중심지로 독특한 모습의 대형 청동 마스크, 청동 신상, 금제 장식품 등 주요 유물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다오 샤오 미엔(刀削面, 칼국수)]

칼로 썰어 만든 면으로 산시(山西) 지역의 전통 국수 요리입니다. 밀가루 반죽을 칼로 직접 얇게 깎아 끓는 물에 넣어 삶아 먹습니다. 직접 손으로 써는 만큼 면이 두껍거나 얇은 부분이 있어 씹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창펀(肠粉)]

창펀(肠粉)은 중국 전통 아침 식사 메뉴입니다. 넓고 얇게 만든 쌀가루 반죽을 쪄서 만든 국수 같은 음식으로, 말아먹는 롤 형태가 일반적입니다. 반죽은 주로 쌀가루와 물, 계란이 들어가며 속재료는 돼지고기 다진 것, 새우, 계란, 소고기, 야채 등 다양합니다. 일반적으론 담백하게 먹는데, 쓰촨성은 주로 칠리맛의 매운 소스를 곁들여서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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