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신록을 더욱 살찌우는 봄비가 밤사이 추적추적 대지를 적셨다. 이튿날 활짝 갠 맑은 하늘문이 열린다.
평소보다 아침 일찍 몸을 일으켜 세워보지만 내 몸이 분리되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얼굴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비벼본다. 일터로 나가기 위해 분주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게 향한 일터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친한 언니들과 내 또래.. 다섯 멤버가 있는데, 일터에서는 우리를 여전사, 혹은 독수리 여전사?로 불린다 한다. 왜 우리를 보고 그런 별칭이 생겼는지 다 알 수 없지만 신입사원분들과 팀장급 분들이 우리를 보면 깍듯이 인사를 한다.
다섯 멤버가 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아주면 쩌렁쩌렁 울리는 합창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나는 가끔 언니들 등 뒤로 숨어버린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사무직에서만 일해왔던 터라 결혼 후 경력단절 된 지 오래되었기에 새 일자리를 구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 시간 직장을 구하자니 남편의 반대로 무산되기 일쑤였는데. 지금 일하는 곳은 땡땡 물류센터.. 타 센터에 비해 비교적 근무환경은 괜찮다. 만 3년이 다 되어가는 이곳에서 단순 노동이었다면 싫증 나서 쉽게 그만둘 것이었지만 이곳은 일 배우는 재미도 있고, 단기 알바이지만 회사 관리자분들이나 직원분들이 무시 못하는 존재들이다.
웬만한 직원분들보다 우리 멤버들이 떴다 하면 관리자 분들이나 팀장님들이 반기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방학 때 대학생들 신규 교육들은 왠 간하면 우리 멤버들이 가르치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진다. 독수리 오여사들만 떴다 하면 관리자분들이 반기는 것은 당연하다.
신입으로 들어와 내게 배운 한 여사원이 있다. 그 A여사원도 일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한다.
내가 여기서 일 한지 만 3년 동안 인간관계에서 트러블은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사람 만나는 것이 재미있고, 즐거웠었다. 문제는 아주 의외인 곳에서 터졌다.
이 A 여사원은 결혼도 하고 마흔 후반대 여성이고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평소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참 밝은 친구라 생각했었다.
점심을 먹고 일하기 시작 5분 전에 삼삼오오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헌데 그 문제의 A여사원이 자신은 돈을 벌면 그날 다 쓴다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한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친한 지인 동생이"아니.. 그날 번 돈을 다 쓰고 없으면 다시 나와서 벌고, 그날 다 쓰고.. 어떻게 그렇게 해? 부럽다." 하며 입을 떼었다. 그런 질문에 A여사원은 당당하게 "돈이 아쉽지 않아요. 그날 벌어 그날 다 쓰는 게 나는 좋아요." 순간 나는 꼰대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친구가 원래 이런 마인드였구나 라는 생각에 놀랐다. "대단하다. 하루 벌어 그날 다 쓸 수 있는 용기가 부럽다." 하며 주변 사람들의 말속에 뼈가 있었지만 이 친구는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말하면 말할수록 이 친구의 이미지가 깎이는 것 같아, 아찔했다. 난 오지랖이 넓게도 "안 되겠다. 자기는 가만히 있어야겠다. "하며 웃으며 건넸다. 순간 주변사람들이 웃으면서 "그래.. 돈 쓰기 위해 돈을 버는 거지.. 그만 얘기해. " "돈이야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게 돈인데. 쓸덴 써야지. 아이도 있고, 돈 들어갈 때도 많은데, 그날 벌어 그 돈을 자기한테 다 쓴다는 게 쉽지 않은데.." 하며 옆에 있던 언니가 말끝을 흐렸다.
잠깐의 수다는 끝나고, 다들 일하러 뿔뿔이 흩어진 순간 그 A여사원이 나를 보며 잠깐 이야기하자고 나를 불러낸다. "사원님? 할 말이 있어요. 생각해 보니 사원님 말이 너무 화가 났어요. 아니... 내가 말하면 말할수록 내 이미지 깎이니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다 있는데서 그런 말을 해요?" 하며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당황한 나는 순간 5초 동만 멍한 채 그 여사원을 바라보다가.. 일단 나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하니 미안하다고 진심을 다해 사과를 건넸다. "일단 사원님이 진정성 있게 사과를 하니 받아주긴 하는데 앞으로 사람들 있는데서 입조심하세요. " 언니라는 호칭에서 사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렇게 기분이 나쁠지 몰랐다. 아.. 입조심하라고..
혼란스러운 감정과 멍한 상태로 내 자리에 왔다. 도대체 왜 사람이 저렇게 돌변할 정도로 내 말이 기분 나쁘게 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이를 지켜보던 친한 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좀 전의 상황에서 그 사원이 내가 한 말이 너무 화가 났다는 말을 전하자. 같이 옆에 앉아있었던 이 언니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고, 이 언니가 오히려 더 흥분해서 언니의 마음속 그분이 올라오셨다. "아니 설사 네가 말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너한테 예의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해. 너는 네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걔한테 싹싹 빌어. 너무 열받네." 하며 그분이 오셨다. "언니! 어떻든 간에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상대방은 크게 마음 상할 수 있어요. " "아니지.. 걔가 너한테 하는 행동을 보니까 이건 아니지. 그리고 지가 떠들었잖아. 지가 떠들어서 컷 시켜서 이미지를 지켜줬더니 이게 무슨 상도덕이야?" 나는 쉴 틈 없이 나보다 더 열을 내는 언니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일하자고 재촉했다.
친한 동생도 이를 지켜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무서워서 말도 섞으면 안 되겠다며 몸서리를 쳤다. 사람들을 그렇게 의식했다던 A여사원은 사람들이 지켜보는데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본인을 더 안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지 안타까우면서 절대로 이 친구와는 가깝게 지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어느 단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아니면 오늘 예민한 날인가? 어디가 아파서 신경이 예민해진 건 아닌가?"생각했다.
하루 종일 이 일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나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고, 앞으로 인간관계에서 말을 왜
곡하는 사람은 피해야겠다는 생각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친구에 대해 분명히 인간관계를 정해야겠기에 일이 끝나고 그 친구를 조용히 불러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솔직하게 먼저 얘기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정말 미안했어. 내 마음도 좋지 않았는데 너도 얼마나 기분이 안 좋았을까,! 언니가 경솔했어. 마음 풀었으면 좋겠어.!" 나의 재차 사과에 이 친구는 "사원님이.." 아.. 언니에서 사원님이라..
"사원님이 어떻게 나오나 반응을 지켜봤어요. 이렇게까지 진정성 있게 사과하니까 받아줄게요. 저는 이젠 괜찮아요. 잊었어요. 사원님도 잊으세요."
하며 자신은 쿨한 사람이고, 승자의 표정을 지으며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내가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이 후회되었다. 처음엔 어쨌든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참 일방적인 친구구나 싶다. 이를 지켜본 친한 언니들과 동생이 나에게 다가와 한마디 한다. "뭔 큰 잘못을 했다고 뭣하러 또 사과를 해. 너한테 무례했던 건 사과도 안 하더구먼.." 나는 욱하시는 그분이 올라오려고 하는 언니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언니.. 제발.. 요. 이제 저도 더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살다 보면 나를 이끌어주고 부족하더라도 세워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말꼬리 잡고 비난하거나, 왜곡하거나 자존감을 떨어뜨려 부정적인 감정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중에 나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인지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인지 자문해 본다. 나를 지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힘들다고 마음 고생하기보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