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의 일상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호주에서의 일상과 현실

by SueB

호주에서 살다가 대구로 왔다고 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왜, 좋은 호주를 두고 대구로?' 의문을 제기한다. 하도 여러 번 같은 질문을 받다 보니 이젠 그냥 '쿠팡, 로켓프레쉬 때문예요'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대답하고 도망을 간다.


한국에서 모아 온 돈으로 영어/마케팅 공부를 하고 나니 별로 남는 게 없었다. 게다가 친정에선 부모님이 반대하는 남자를 만난 죄로 결혼을 해도 지원해 주시는 건 거의 없었고 또 독립해 사는 것이 당연한 시댁의 문화라 우리 둘은 호주에서 같이 잘 살아남는 게 목표였다.


절대로 선생님은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던 남편은 대학원 공부 중 연락온 예전 마케팅 교수님의 시간강사 자리 제의를 나의 협박에 가까운 '충고'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한국인 회사에서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주 6일을 일해야 했다. 지금 뒤돌아 보면 힘들고 무서웠던 시기였지만 당시엔 재밌게 살았던 것 같다. 하긴 한국에선 주 6일에 주기적으로 밤 12시 퇴근이었으니 최소한 6시에 퇴근하는데 힘들게 느껴졌을 리가 없다.


비록 월세 원룸에서 차도 없이 7년 가까이 살았지만 바다가 가까워 휴일엔 도시락을 가지고 가서 해변가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둘 다 식당이나 카페가 아닌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원룸에 기본적인 가구는 포함되어 있어서 목돈을 들여 살 필요도 없었고 일요일엔 전차 타고 한국인들이 모여사는 동네에 가서 한식도 먹고 한국식품들을 사들고 오는 것도 즐거웠다.


나중에 차가 생겼을 때 남편에게 조용히 '난 더 이상 차 없이 식료품 쇼핑을 가지 않을 거야.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아마도 나도 모르게 양손에 이고 지고 전차를 타고 돌아와야 했던 식료품 쇼핑행사가 서럽게 기억되었나 보다 ㅠㅠ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 나중에 2층집과 렉서스를 사놓고도 여전히 우리는 집 근처 쇼핑몰을 걸어서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도 차를 잘 몰지 않아 가끔 배터리가 방전되기도 했으니 ㅎㅎㅎ


대구에 와서도 2년 정도 차 없이 지냈다. 1년 정도는 한국에서 운전을 할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차를 주문하고 1년 정도 기다려야 해서. 지금도 차는 매주 정기적으로 부모님 모시고 병원 가거나 모임에 모시고 갈 때 사용하고 나머지 시간들은 부모님 동 앞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마당이 있는 집에서 바비큐를 해 먹는 호주에서의 삶은 호주에 도착한 지 10년 정도 지나서 가능했던 것 같다. 둘 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일정기간 저축한 기록이 있어야만 집을 사기 위한 대출이 가능하기에 영주권이 나오고도 한동안은 좀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고 저축하는데 집중했다.


원하는 집을 사고 한동안은 이사 전 간단한 리모델링을 위해 업자들과 상의를 하고 주말마다 필요한 가구들을 사러 다니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내 집을 꾸민다는 것은 당시 30대였던 우리에겐 중요했고 가능했지만 50대에 대구에 정착했을 땐 둘 다 그저 필요한 것을 적당한 가격에 편리하게 주문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에 에너지를 쓰기엔 나이가 들어버린 것인지 이제는 가구를 사러 돌아다니지도 않고 대부분 온라인으로 해결했으니 ㅋㅋㅋ


이케아랑 이름이 알려진 대부분의 가구점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 가구점까지 모두 휩쓸고 다닌 후 결정한 소파는 당시 키우던 고양이가 1년 만에 파괴해 버린 건 안 비밀이다. 다행히 저렴한 이케아 소파였고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다음 소파를 특수천(?)으로 주문 제작해 호주를 떠나올 때까지 사용하였다.


처음 이사 후 날씨가 좋은 날은 당연히 정원에서 바비큐로 저녁을 먹거나 크리스마스 시즌엔 친구들을 초대해 식사를 하곤 했다. 당시에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면 우리의 상상 속 호주인들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 정원정리와 청소등에 지치다 보면 서서히 멀어져 가는 일상일 뿐이다. 잔디만 있던 정원에 작은 텃밭을 만들어 주말시장에서 사 온 모종들을 심어 키우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건조하고 35도는 넘는 멜버른 여름 날씨에 대부분의 채소들은 타 죽어 버렸다.


뒷마당 중앙에 있던 작은 레몬나무는 크지도 않고 레몬도 거의 열리지 않아 한 2년 뒤 뽑아 버렸고 이미 너무 커서 손을 댈 수가 없었던 뒷 펜스 앞의 사과나무는 지나가는 앵무새들에게 매년 좋은 먹이를 제공해 주었다. 물론 청소등 뒷일은 우리 몫이었으나 ㅠㅠㅠ 크지도 않고 시기만 해서 우리가 먹기에도 힘들고 그렇다고 퇴비를 줘가며 열심히 키우기엔 열정이 없었다. 그림 같은 그네 위를 둘러싸고 있던 포도도 이제 곧 익겠지 하며 기다리고 있다 보면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10여 년 동안 살면서 단 한번 포도를 추수해 쨈을 만들어 먹었을 뿐이다.


그래도 가끔 고양이들과 사과나무 밑에 피크닉을 즐길 수도 있었고 그네를 타며 향기로운 포도내음을 맡을 수도 있었다. 특히 사진을 찍으면 참 예쁘게 나왔으니 우린 그걸로 만족했다. 대구에 정착했을 땐 당연히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 다른 동으로 왔으며 우리 둘 다 너무 만족하고 있다.


은퇴를 준비하던 중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회계가 아닌 조금 여유로운 부서로 옮겨 1년을 일하고 그 이후 1년의 장기 휴가로 대구에서 살아보고 은퇴를 결정하려고 했는데 2020년 3월 대학에서 갑자기 재택근무를 하라고 했다. 5월부터 휴가를 신청해 놨는데 공항이 닫혔고 호주시민들은 나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휴가 시작을 조금 미룰 수가 있어 좀 더 재택근무를 하다 8월부터는 그냥 집에서 놀았다.


집밖으로 나가는 것은 산책 30분과 식료품 쇼핑만 허가되었으며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서로 피해야만 했다. 친인척 방문도 금지되었으며 누군가의 방문이 목격되면 경찰에 신고가 되어서 벌금을 물었다. 쇼핑도 5km 이내만 가능해 근방의 가게만 갈 수가 있어서 품절이 된 물건을 찾으러 돌아다니기에도 힘들었던 시기였다. 화장실 휴지나 티슈는 계속해서 품절이라 1가구당 1박스만 살 수 있어 주기적으로 찾으러 다녀야 했고 정육공장이 코로나로 폐쇄되었을 때는 고기를 구하러 다녀야 했다.


다행히 내가 살던 동네는 그릭커뮤니티여서 슈퍼도 많고 야채, 생선, 정육점등 신선 제품을 파는 상점이 많은 편이라 다른 지역에 살던 사람들보다 쇼핑은 쉬운 편이었다. 친구는 5km 넘게 떨어진 슈퍼마켓에 가다가 경찰에 걸려 벌금을 물었다고도 했다. 발 빠른 한국식당주들끼리 배달 네트워크를 만들어 지역마다 날을 정해 배달을 해주기 시작했다. 나의 요리실력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때라 너무 반가운 서비스였다. 아무리 2층집이고 정원이 있지만 한동안 집에 갇혀 살다 보니 건강에도 이상이 오는 것 같아 유튜브를 보며 간단한 운동도 하며 매끼 직접 해 먹고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오는 배달 음식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스크는 구하기가 힘들어 한국인커뮤니티에서 천으로 만들어 파는 걸 주문해서 밖으로 나갈 때 사용했다. 한국인들보다 더 발 빠른 사람들이 중국인들이었는지 나는 구할 수 없던 일회용 마스크를 중국으로 돌아갔던 친구가 멜버른의 중국회사에 주문을 해서 보내주었다.


이렇게 피난민도 아닌 이상한 생활을 하다 보니 드디어 호주정부에서 자국민들에게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호주를 나갈 수 있는 허가를 준다고 했다. 부모님의 연세를 핑계로 돌보러 가야 한다고 신청을 했는데 다행히 허가가 나와 가장 빨리 나갈 수 있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근데 예전에 국방부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에게서 '나 한국 간다'라고 연락이 왔다. '나도, 언제나가?' 재밌게도 호주에 있는 한국계 방위산업회사로 옮긴 옛 동료 들을 같은 비행기에서 만났다 ㅎㅎㅎ 새로운 계약을 하고 한국방문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 호주정부가 공항을 열자마자 신청하고 나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나한테 연락을 한 것이었는데 같은 비행기로 나가는 건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내가 당시 은퇴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 팀에 같이 있었을지도...


한국에 도착하고 2주간 집안에 갇혀있었지만 감동의 연속이었다. 너무나 매끄러운 수속과 동선을 절약해 대구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코로나 검사 후 대기하던 택시가 집까지 데려다줘서 안전하게 감금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언니집으로 가고 우린 부모님 집에서 2주간 지내기로 했다. 당연히 모든 식품은 준비되어 있었는데 구청에서 추가적인 물품을 배달해 주고 주기적으로 확인전화도 해주었다.


유일한 문제는 가끔 밤 12시가 지나서 울리는 확인 전화였다. 밤 되면 GPS가 미치는 것인지 남편의 전화기 위치가 자꾸 아파트 밖으로 나온다고 유선전화기로 확인전화가 오곤 해서 자다가 거실로 달려가 유선전화기를 받고 나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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