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유학, 이민, 역이민

배낭여행

by SueB

내가 고등학교 때 88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외국을 나간다는 것은 국가장학금으로 유학을 가거나 회사업무로 출장이나 일을 하러 가는 이유로만 가능했으며 그것도 정부허가와 반공교육을 이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88 올림픽 이후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됨에 따라 내가 대학을 갔을 때는 배낭여행이 하나의 트렌드로 대두하였다.


부모님이 용납하는 수준의 대학을 가기 위해 후기에 진학한 대학에는 입학금만 내놓은 채 재수를 해야만 했던 나는 부모님에 대한 모든 기대를 그 1년 동안 포기하게 되었다. 부모란 존재도 결국 나의 행복보다는 자신들의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생생히 경험한 1년의 재수생활은 나를 오히려 독립적으로 만들었다. 부모님이 원하던 대학(?)을 가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라고 했던 부모님은 더 이상 나를 말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학입학 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부모님이 주는 용돈마저 거부했기에 부모님은 나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힘든 재수시절을 보내고 부모님이 만족하는 수준의 대학에 입학했지만 기대하던 대학생활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에 힘들어하던 나는 더 이상 하고 싶은 것 앞에서 주저하거나 참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재수를 실패한다면 자살을 고려했기에 그 당시 나에겐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없었다.


우연히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료들과 배낭여행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한번 가 보기로 결정을 했다. 결혼예식장에서 비디오 촬영기사로 일하던 우리는 여름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여름방학기간 동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기로 했다.


첫 13일 동안은 콘터키 투어버스를 타고 단체로 여행하며 주로 캠핑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그 이후 선택적인 자유여행을 할 수 있는 젊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던 우리에겐 적당한 프로그램이었다. 영어를 못했지만 내가 다니던 대학이름만으로 내가 영어를 잘한다고 믿던 동료와 투어를 함께 떠난 그 여름은 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편안한 환경에서 친절하고 여유롭던 사람들이 힘들어지거나 자기 통제를 잃었을 때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충분히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영어라는 언어를 잘하고 못하고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들으려고 또는 의사를 표현하려고 노력하는지가 여행에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1달 동안 유럽여행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하던 부모님은 배낭여행이란 의미조차 몰랐지만 반대부터 하셨다. 나야 당연히 부모님께 일정을 통보한 뒤 짐을 싸서 공항으로 갔을 뿐이다. 부모님의 의사에 반하면 자식들을 방안에 가두었던 친척과 이웃들을 보며 성장했던 나는 최소한 육체적인 구속은 시도 않았던 부모님께 지금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또 학기 중 열심히 돈을 벌어 겨울방학엔 따뜻한 인도로 떠났다. 물론 아빠는 걱정 때문에 앓아누웠지만 나를 막지는 못하셨다. 말렸다간 성질 더러운 막내딸이 어디로 튈지 몰라 걱정하던 아빠는 내가 돌아오자 인도여행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며 자신도 인도로의 자유여행을 꿈꾸기 시작하셨다.


배낭여행은 힘들었지만 내가 세상을, 또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 주었다. 물건에 대한 애착이 없어졌다. 내가 짊어지고 움직일 수 있는 무게로 배낭에 내가 필요했던 모든 것을 담아야 했기에 나의 필요와 내가 들고 다녀야 하는 무게라는 두 개념에서 항상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1~2 달이라는 기간을 적은 예산으로 여행을 해야 했기에 정말 필요한 것에만 돈을 사용해야 하는 선택에 익숙해졌다. 또한 여행을 하는 이유를 잊지는 않는 소비를 해야만 했다. 어떤 친구들은 루브르 박물관 입장권이 비싸다고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가기도 했지만 나의 여행목적은 다양한 경험이었고 당연히 그 비싼 비용을 지불하였다.


인도에서 기차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몰랐다. 새벽기차를 타기 위해 열심히 달려갔지만 기차는 4시간 뒤에 왔다. 그래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경찰이 지나가던 사람을 채찍으로 무지막지하게 패고 있었지만 아무도 막지 않았다. 유적지를 방문할 때마다 근방의 길에서 살고 있던 거지들이 따라붙었지만 함부로 돈이나 음식을 제공할 수 없었다. 길에서 살던 그들은 거지라기보다는 그냥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을 뿐이다. 부잣집에 고용된 하인들도 방이 주어진 경우보다 부잣집 정원 구석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의 생김새는 그들의 신분과 재력에 따라 달랐다. 계급은 당연한 것이고 그에 반항하는 것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종교가 개인의 삶과 모두의 인생을 지배할 수 있었다. 내가 먹을 수 있던 수준의 식당이나 쇼핑을 하던 가계 앞에는 항상 경비들이 서 있었다.


첫 도착지였던 캘커타는 많은 배낭족들이 여행을 포기하게 만든 여행지였다. 캘커타에서 3일을 버티면 세상 어느 나라도 여행할 수 있다고들 할 정도였다. 팔다리가 없거나 다양한 방향으로 꺾여있는 장애인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구걸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돈을 주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갓 태어난 아기들의 팔다리를 꺾거나 분질러 장애인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곳으로 유명해서 다양한 절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만난 어린 동네 꼬마들은 여자 배낭족들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졌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통과하며 모래를 파고 들어가 하룻밤을 잘 때 본 별들은 너무나 밝고 화려했지만 낮의 거리는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로 비참했었다. 도시전체가 채식주의라 가장 안전한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길에서 땅콩이나 삶은 계란이 보이면 사 먹어야 했다. 껍질을 제거해 막 먹으려는 계란이 길에 떨어졌을 때 뒤에 오던 평범한 아주머니가 냉큼 주워 입에 넣고 씨익 웃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이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1달이란 여행을 마치며 다시 캘커타로 비행기를 타러 돌아가기 위해 2박 3일 기차를 타야 했다. 우리들의 자리는 이미 인도인 가족들이 앉아 있었고 그들이 내린 후에야 온전히 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음식 주문을 받은 꼬마는 돈만 가지고 도망갔고 밤에 잠을 자기 위해 누우면 사방의 눈동자들이 나의 작은 기척조차 감시하고 있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모습은 기차의 창으로 바라본 허름하고 마른 아빠와 아들이 땅바닥에 주져 앉아 놀고 있는 것이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인데 최소 1~2세기라는 시간의 차이가 나 보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웃음이 참 맑아 보여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지 고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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