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기대어, 느낄 수 있는 뜨끈함을 곁들인.
카레를 좋아한다. 지금의 남편이, 남자친구였을 때, 카레를 먹으러 아비꼬에 참 자주 갔다. 그때 그는, (남편이라는 나름 확정적인 지위(?)를 얻기 전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지금보다 자기 의사의 강도가 소박했다.) 매 주말마다 카레를 먹자 해도, 흔쾌히 '그러자' 했다.
요즘은 인스타를 통해 요가원을 같이 다니는 분들의 일상을 많이 엿본다. 유독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 연달아 야채수프라고 부르는, 뭔가 카레와 비슷해 보이는 걸 드시는 걸 보고, 야채 수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인스타 디엠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여쭤봤었다.
"선생님! 야채 수프 어떻게 끓이는 거예요?"
회사 생활에 치여 급급하게 지내기에, 퇴근하는 길에야 읽을 수 있었다. 적어도 A4 양면은 족히 나올 것 같은, '이걸 다 언제 어떻게 쓰셨담?'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써주신, 아주 상세한 설명을.
사실, 유튜브나 인터넷 사이트를 공유해 주셨다면, 해 먹지 않았을 거다. 보기보다 재료도, 손도 많이 가보였다. 그런데, 하나하나 일일이, 그 단계의 주의사항, 예컨대, '야채에서 수분이 나오니까 물을 많이 넣으면 안 된다.', '양배추까지 넣으면 냄비가 넘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낄 수 있다.'같은 것까지 적어주셨으니, 응당 그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해 먹어야 했다. 평일 저녁 퇴근 후에 먹으려면, 적어도 밤 10시가 돼서야 먹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주말을 기다렸다.
레시피를 알려준 선생님께선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시작하라 하셨지만..., 우리 집 냉장고엔 뭐가, 원래, 없다. 카레를 위해 7만 원어치 장을 봤다. 파슬리나, 양송이 같이, 우리 냉장고에는 처음 보관되는 그런, 재료들을 샀다.
무려 마음을 다잡고, 주방에 섰다. 우선 핸드폰으로 보내주신 레시피를 켜놓고,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양파를 자르고, 감자와 고구마 껍질을 필러로 깎아냈다. 감자는 나중에 으스러질 거라는 레시피 설명에도, 괜스레 기분을 내보고 싶어, 둥글게 깎았다. 당근을 자르고, 파슬리, 양송이, 양배추도 잘랐다. 중요한 포인트라고 하신, 후숙 하려고 밥 솥 위에 올려놓은 찰 토마토와 냉장고 한켠에서 쭈굴쭈굴해지고 있는 방울토마토들도 준비했다.
양파를 버터에 볶고, 나머지 재료를 한 번에 넣고 물을 넣고 끓였다. 어느새 냄비 뚜껑을 힘차게 밀어내고 물이 넘쳤다. 아까웠지만 국자로 부랴부랴 야채 육수를 500ml 넘게 버렸다. 그래도 자꾸만 넘쳤다. 끓이면 재료들이 폭삭 주저앉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냄비가 작아, 양배추는 넣지도 못했다. 고민하다가 냄비를 하나 더 꺼내서 카레를 반절씩 나누고 양배추를 마저 넣었다. 카레를 물에 개서 풀고, 고기를 따로 마늘에 볶아 먹기 전에 올렸다. 모짜렐라 치즈도 올리고 올리브 유도 한 바퀴 둘렀다.
장장 2시간이 걸린 야채 카레. 시간에 비해, 식탁 위에는 달랑 한 대접의 카레와 빵만 올랐다. 평소 같으면 "에게?" 싶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충분하게 느껴졌다. 남편과 한 대접씩 다 먹고 나니 든든했고 뜨끈함이 후욱 올라왔다. 위장이 뚝배기처럼 묵직하게 데워졌다. 그리고, 갑자기 불현듯, 글이 쓰고 싶었다.
나에게 레시피를 가르쳐준 분과 드문드문 연락을 하며, '그녀가 내 엄마였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엄마라는 역할은 누구에게나 무거울 것 같기에, '그랬음 좋겠다.'는 생각조차 조심스러웠음에도. 그녀는 이미 누군가의 엄마이기에 내색한 적도 당연히 없지만. '그녀가 내 엄마였다면, '이라고 몰래 상상한 적이 있다.
엄마한테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연락하고, 집에서 남편과 해 먹고 맛있었다고 얘기하는, 아주 일상적인, 그런 일들이 있길 바랬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한테 기대고 싶다는 것도. 하물며 그게 레시피일지라도.
서로 짊어진 짐이 이미 무겁고, 한계선에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다. 아주 작은 무게만 올려져도 세상 전부를 떠넘기는 것 같을까 봐, 우리 모녀는 서로 '괜찮다. 잘 지낸다.'는 얘기만 한다. 그래서 야채카레를 먹으면서 눈물이 났다. 엄마에게 기대면 이렇게 따뜻하겠지, 뭉근하게 안심이 되겠지, 싶어서. 그 온도를 카레가 대체해 주는 것 같아서.
야채 카레를 아마 4일 내내 먹어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다.
따뜻함을 더욱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겨울을 시작하기 참 적당한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