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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론즈실버 Sep 14. 2022

#4 처음 해본 내돈내산 사진 찍히기

작가님, 이번엔 신발 신어도 되나요?

  그러니까, 처음 '이 사람'에게 사진 찍히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사람이 중심이 아닌 자연이 먼저 보여서였다. 풀, 사람, 나무, 잔디, 흙의 질감 같은 것들. (그땐 왜 몰랐을까. 그렇다면 피사체인 사람이 먼저 길 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포트폴리오를 몇 번이고 되새김했고, 본캐의 계정도 정독했다. 어떤 사람인지 알고서 사진 찍히고 싶었고, 빨래 건조대를 아이패드 거치대로 쓰는 그를 보면서 반했던 것 같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에게 사진 찍힌다고 동네방네 소문도 내고 다녔다. 살을 빼야 한다고 말도 조금 했던 것 같다.


 부랴부랴 일어나, 요가원에 가서 몸을 풀었다. (요즘 우리 원장님은 말이 너무 많으시다. 가끔 구령대를 바라보며 서서 훈화 말씀을 듣는 어린이가 된 것만 같다. 쩝) 평소같으면 타협하며 안갔겠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이상태로 가면 나는 파스치모타나사도 못한다고!!!


서울숲으로 가기 전에 오빠와 좀 다퉜다. 서울숲에 볼리를 데려가네 마네하며. 역시 나는 데려가자는 편! 화가 나서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고, 결국 오빠에 도움으로 서울슾에 갔다. 고마워 남편이자 남자 친구!



작가님을 만나서 인사를 했다. 커다란 손, 생각보다 큰 키. 꾸벅 인사하고 악수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맨발 투혼을 시작했다. 그냥 풀이 없는 땅, 꽃이 맺힌 풀만 가득한 땅, 베이는 풀들이 가득한 땅, 그냥 길바닥. 나는 그렇게 땅의 질감이 다채로운지 처음 알았다. 단단하고, 말랑하고, 푹신하고 질펀하고.

다행히 어제 발가락 제모를 한탓에, 발 위를 지나가는 개미들의 발자국은 덜 느꼈지만, 작고 다양한 곤충들이 '이렇게 무자비하고 인정머리 없는 자연현상은 처음!!!!'이라고 외치거나, 또는 비상!!!!!! 을 알리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래도 작가님이 누워보라니 누웠고, 앉아보라면 앉아봤다. 뭐.... 별 수 없잖은가. 나는 프로가 아니고 그는 프로인 것을?



미리 우리가 줌 미팅을 가질 때, 그가 내게 물었었다. 목 뒤 흉터가 진심으로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면 아예 쓰지도 않았을 텐데, 무의식 중에 신경 쓰이는 거 아니냐고. 글쎄, 근데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왜냐면 아예 보이지 않거든. 근데 다들 먼저 안쓰럽게 여겼다. 문신으로 덮으란 말도 들어봤고, 목의 가동범위를 늘려야 하는 아사나를 못하는 나에게 힘내라고 했다.


 나는 막상 목덜미를 따라서 등까지 내려온 넓은 나만의 자국이 떳떳하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온 군인들이 흉터를 자랑스러워한 마냥,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요가를 수련하고 자세를 바로 세우고, 안 되는 자세를 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내가, 그렇게나 소중하고 멋있다. 나만의 시그니쳐다.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타투이고, 부드러워도 심지 있게 살고 싶은 나의 의지다.  


그래서 남기고 싶었다. 나는 어지간 해선 볼 수 없는 나의 과거, 나의 꽃대, 나의 뿌리.


다리 사이로 개미집이 보였고, 작가님이 일어서라고 하기만을 기다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뻐근하던 어깨를 부여잡고 가까운 병원에서 진료를 봤다가, 골모세포종이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진단을 받았다. 강남세브란스에 입원하여서 처음엔 종양을 떼려고 수술을 했고, 상처가 아물 즈음 그 자리를 그대로 다시 열어 골반에 있는 뼈를 이식했다. 총 20시간에 가까운 수술을 했고, 수혈을 20팩 가깝게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하필 수술 전날 야속하게 말하며 동의서를 받아갔다. '열 손가락이 야무지게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펜을 잡지 못할 거라고, 단추를 끼우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수술 전날에 부단하게 손가락으로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걸 다 해봤다. 병원에서 플루트를 불고, 엄마 아빠한테 편지를 쓰고, 괜히 환자복의 단추를 풀었다 끼웠다가 했다.


중환자실에서 어슴푸레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해봤던 건 손가락 움직이기였다. 고마웠다. 다 내 것 같았다. 십 년이 지난 지금, 하나하나에 감사하며 요가를 한다. 할라아사나가 안되면 어때, 고개를 다 젖히지 못하면 어때. 그래도 내 몸이 다 내 몸 같은 걸. 오히려 욕심 없이 감사할 수 있는 걸. 당연하지만, 당연한 건 아무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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