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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일 Sep 28. 2023

노을 지는 풍경에 달리고 싶었다

온라인 회의 때문에 점심 전에 일찍 와서 회의를 하고 퇴근시간까지 있다가, 땡 하는 순간에 방을 나갔다. 간만에 치킨 세트를 먹었더니 배는 별로 안 고플 것 같았는데 배가 안 고파도 과일주스집에서 두유나 한 그릇 해야지 싶어서 잔돈을 들고 나선다. 가는 길에 스프링롤 집에 지난 일요일인가에 하나 남은 걸 보고 오는 길에 사야지 했다가 누가 홀랑 사가서 털레털레 왔던 그것이, 오늘은 두 세트가 남아있다. 이번에도 다 팔리면 내 것이 아니겠거니 하며 지나가서 과일주스집에 도착한다.

중학생이 될까 말까 한 눈 동그란 소녀는 이제 나를 보고 반갑게 웃어준다. 역시나 메뉴 이름은 모르므로 두유가 담긴 통을 가리키고, 얼음컵 사진을 보여준다.

보통은 뜨거운 채로 많이 포장해 가는데, 그러면 당장에 먹을 수 없다. 아무튼 이게 저녁이다 하면서 먹으며 뒤돌아 가는데 아직도 스프링롤이 두 개 남았다.

하나 사서 간다. 2만킵. 맛있다는 말도 전한다.

20분 정도 걸어 숙소 쪽으로 코너를 돌자, 강둑 위로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한껏 모여있다. 하늘은 붉게 물들어가고 더 높이서부터 어둑해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직선으로 뻗은 강둑 위에 올라 오토바이를 세우고 강 속으로 붉게 물들며 저무는 낙조를 보고 있다.

높은 둑 위로 걷거나 뛰는 사람들의 검은 형체와 그 위로 붉게 부서지는 노을이 장관이다.

해는 빠르게 넘어가고 잠시 잠깐마다 하늘색이 번진다.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간다. 저기 높은 곳에서 물드는 하늘을 보며 달리고 싶다. 빨리 옷을 갈아입고, 달리는 바닥이 거칠어도 지는 해를 보며 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솟구쳤다. 무릎보호대도 하고 야무지게 옷을 갈아입는 동안 바깥 풍경은 빠르게 변한다. 달리려고 나간 숙소 유리문 밖은 벌써 어둑어둑하다. 차가운 에어컨 공기를 유리문으로 밀며 나가자, 덥고 습한 공기가 나를 덮친다.

‘뛸 수 있을까? 이 공기에?‘라고 생각이 들다가

’이 정도면 할 만하다.‘ 조금이라도 지는 해를 보며 달리고 싶어서 서둘러 비탈면을 오른다. 내 앞뒤로 오토바이가 내려가고 올라간다. 이미 해는 다 넘어가서 강둑은 컴컴해진다. 사실상 강둑 위에서는 바닥도 보이지 않을 만큼 칠흑같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터벅터벅 내려온다. 저 멀리 평소에 뛰는, 공공기관 건물들이 있어 차도, 개도 없는 길에 환한 가로등과 노랗게 변한 도로가 보인다. 달리기 어플을 켜는데 오늘따라 켜지지도 않고 업데이트를 해도 한참은 되지 않는다. 나이키 달리기 어플도 켜보지만, 다시 로그인을 하려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진흙이 된 경사면 위에서 수 십 분을 서있었던 것 같다. 채비를 다 하고 나왔는데 이대로 달리기가 무산되는 것인가? 사실 없이도 나 혼자 뛰지만, 제어장치가 없으면 얼마나 뛰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실행하지 않고 달릴 수가 없다.

한참을 껐다켰다를 하니 드디어 시작된다. 이미 해는 완전히 떨어졌고, 가로등의 유무에 앞이 보이거나, 아무것도 안 보이는 곳이 극명하게 나뉜다.

우선은, 잘 아는 밝고 탁 트인 구간으로 진입한다. 차도, 오토바이도, 개도 없는 도로 위를 달린다. 한가운데를 달려도 별로 상관이 없다. 시장건물 가기 전까지는 거의 통행이 없다. 평소에 터벅터벅 달렸다면, 2번 왕복 후 다시 세 번째를 시작하니까, 속도를 좀 더 내본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저녁 겸으로 달달한 두유를 먹어서인가, 달릴만하다.

발이 닿는 곳으로 간다. 과일주스집 가는 길과는 달리 오토바이가 별로 없다. 반짝이는 장식물, 선전물이 길 곳곳에 있다.

어두운 밤, 로터리, 가로등 아래의 반짝이는 장식물이 있는 길로 발이 자꾸 움직인다. 불빛에 반응하는 벌레는 반짝이는 것을 뭘로 인식하고 달려드는 걸까. 아름다워서?

로터리의 크리스마스 장식 같은 조형물을 따라가고, 거기를 돌고, 어떤 길인지 모르겠지만 머리 위로 새하얗게 빛나는 형광등 빛깔의 알전구가 줄지어 머리 위를 비춘다. 그리고 내 앞에서 달려가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달려도 되는 길이라고 안내해 주는 것 같아 안심된다.

그 구간을 지나고 다음 길이 직선이었나, 왼쪽으로 빠졌고, 나는 마지막구간이라 숙소 방향으로 돌아가는데 놀랍게도 조명 하나 없는 길로 들어섰다. 건너 건너 뚝 떨어진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빛만 조금씩 있는 상황.

정말 칠흑 같은 어둠을 나 혼자 달리고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들어서지도 않았겠지만 왜인지 안심이 되어서 달릴 수 있었다. 그래도 가끔 나타나는 오토바이와 자동차의 불빛에 도로 노면이 조금씩 보여서 마지막구간까지의 달리기를 완료하고 남은 길을 천천히 걸었다. 문득 마사지가게의, 앞이 보이지 않는 디즈니 공주님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나날, 밤이 오면 이렇게 모든 이들도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낮에 잠시 볼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면, 평생이 어두운 밤인 것도, 얼핏 보이는 것만으로도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이게 어떤 위로도 되지는 않겠지만.

앞이 보여도 이렇게까지 어두운 밤이면, 빛이 없다면 못 보는 건 매한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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