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다쳐도 출근하는 유치원 교사

그리고 엘리베이터

by 해봄

나는 체격에 비해 뼈대가 아주 가는 편이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발목을 수없이 다쳐 왔다. 특히 오른쪽 발목!


인대 늘어남, 인대 파열, 골절, 다양하게 경험했고


이제는 발목 부위를 하도 다치니 응급처치도 척척하고 이 정도 고통이면 통깁스인지, 반깁스인지, 보호대인지 구분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 오던 구월의 어느 날, 심각한 컨디션 난조로 일을 하기 어려워 병 조퇴를 했다.


퇴근길에 미끄러져 오른쪽 발목이 꺾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어오른 발목을 찜질하고 심장보다 높이 올려두었다.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감이 왔다.

이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한다는 걸!


더 이상의 고민 없이 절뚝거리며 비를 뚫고 정형외과에 갔고, 다행히 경미한 수준의 인대 파열이었다.

보호대 2주 조치와, 물리치료 처방이 이루어졌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 이 부위 많이 다쳐보셔서 아시죠? 최대한 발목에 무리가 안 가야 합니다. 걷기 자제하시고요, 뼈보다 인대 부상이 더 안 낫는다는 건 아시죠?"

라고 하셨다.


오른쪽 발목을 하루 이틀 다친 게 아니었으니

오른쪽 발목은 불안정한 상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무게를 덜 디디게 되다 보니 매우 약했다.

그래서 나는 병가를 쓰고 싶었다.


유치원에 가면 모든 환경이 아이들 사이즈인 불편한 곳에서 분명 다리를 많이 쓰고,

무의식 중에 발목에 무리가 가는 자세를 취하게 될 게 뻔했다.


하지만 내가 다리를 다친 9월은 온라인 학부모 참여수업 영상 촬영을 해야 했다.

무려 9월 한 달치의 활동과 놀이 모습을 모두 영상으로 촬영해 브이로그처럼 편집해야 했고,


내가 의사 선생님의 진단만큼 2주를 쉬게 된다면

내 발목은 깨끗이 낫겠지만, 찍어둔 영상이 없으니 다른 반에 비해 분량이 적을 것이고,

지적받을게 틀림없었다.

병가를 쓸 수 없게 '눈치가 보이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유치원에 나보다 먼저 팔목과 다리를 다치셨던(나보다 훨씬 심하게 다치셨다) 선생님도 병가 없이 출근했었기 때문에,

눈치를 잘 안 보는 편인 나도 눈치가 보였다.


유치원 사람들이 날 두고

'부러진 것도 아니고 삔 거고, 깁스한 것도 아니고 보호대 정도인데 유난을 떨며 병가를 사용해 피해를 준다.'라고 생각하실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난 바보처럼 병가를 쓰지 못했고,

다친 발목으로 영상 찍는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쭈그려서도 찍고, 바삐 움직이며 영상을 찍다가,

발목이 예상보다 낫지 않아 보호대를 3주나 하게 되었다.



왜 학부모님께 발송할 브이로그를 이렇게 한 달 동안 영상을 찍어서 만들어야 하는지,
하루 종일 카메라만 들고 있으니 아이들이 그만 좀 찍으라며 불편해했고,
나도 아이들의 놀이와 대화, 행동을 살피고 상호작용하기보다는 보기 좋은 영상을 뽑아내기 위한 활동에만 치중했다.

그리고 병가를 쓸 수 없었다.




원장 원감님은 커다란 보호대를 차고 절뚝거리는

나에게 "아이고 다리가 불편해서 힘들겠네"라는

'말'만 하시고,

나에게 병가를 권유하거나 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예의상의 말조차 하지 않았다.



정말 학부모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교사와 아이들이 모두 피해를 보는 상황.

하루하루 지날수록 억울하고 울화통이 치솟았지만

그 와중에 해맑은 아이들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다리를 다쳤다는 사실을

하루 만에 집에 가서 소문내버리는 바람에,

학부모님들께 먼저 선생님 다리 괜찮으시냐는 안부 전화가 여럿 오기도 하고! (감동이었다)


평소에 아이들은 타지 못하게 하는 엘리베이터를 내 발목 핑계를 대며 당당하게 태우고 다녔는데,

아이들 거주지가 대부분 아파트인 지역이라 집에서 많이 타 보았을 텐데도,

매번 "우주선 탄 것 같다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웃음이 났다.


물 가져다 주는 사랑둥이

무려 선생님 움직이면 다리 안 낫는다며

복도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까지 떠다 주는 호사를 누렸다...!

진심으로 내 걱정을 해주는 건 미우나 고우나

우리 아이들 뿐이었다.

덕분에 울화통 터지는 상황을 아이들 보고 참았다.




3주가 지나 보호대를 풀고 출근한 첫날,

원장 원감님은 "역시 젊어서 금방 낫네"라고 하셨고,

아이들은 내가 보호대를 푼 걸 축하해주면서도,

내심 이제는 엘리베이터를 못 탄다는 생각에 아쉬운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그래서 아픈 날 챙겨 준 보답으로,

이 사랑둥이들을 위해 한번 더 서비스하기로 했다.

얘들아, 선생님 아직 발목에 힘이 약하시니
오늘까지만 엘리베이터 타자!

그러자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역시 귀여운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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