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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Oct 27. 2022

애잔 그리고 애증의 관계, 중간관리자

원감님 아프지 마세요

유치원에 근무하던 시절,

원감님과 나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였다.


20년이 넘도록 공무원이자 희생과 봉사의 스테레

오타입 직업인 유치원 교사로 살아오신 원감님과,

그런 원감님보다 딱 스무 살 어린, 할 말은 다 하고

불합리한 것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나는


서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원감님은 '원감' 자리가 처음이었고,

나는 '교육공무원' 자리가 처음이었다.

우리의 첫 해는 무탈하게 흘러갔다.

현재의 위치가 처음이고 적응하기 바빴던 탓일까...?


둘째 해부터 우리의 관계는 삐걱거리면서도

'애증'의 관계가 되었다

서로 너무 달라 이해할 수 없고 때론 미워하면서

서로를 짠하게 여기는 그런 관계.



원감님께서는 원장님의 뜻을 교사들에게 어떻게든

관철시켜야 했기에, 그리고

20년을 교육공무원으로 살아오면서 본인의 인식에

서는 '당연히, 원래 하던 거니까 그냥 해오던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이 모든 갈등이 본질적으로 나와 원감님의 개인적

문제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진솔하게 때로는

울기도 하며 서로를 이해시키려 애썼다.

원감님과 나의 갈등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고,

그렇게 서로 물고 뜯어 놓고는 나란히 야근하며

초콜릿을 나누어 먹고 충혈된 눈으로 함께 퇴근했다.




휴직을 하기  마지막 날까지 원감님과 논쟁했.

그날은 개학 2-3 전이었지만  학기 준비가 

어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모두가 미친 듯한 가위질

과 새 학기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원감님은 교사들에게 '내부규정 관련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셨다.  난리통에.....


새 학기 준비가 되지 않아 개학하기 버거울 듯한 수준인데, 이 상황에 회의라고?
회의에 가면, 문제에 대한 답은 없고 교사들이
찾아내기를 원하실 텐데 그럼 회의는 몇 시간이나 걸릴까?
왜 유치원 내부규정 회의에 교사가 참석하지?
안건이 아이들 교육 관련도 아니고 운영 관련인데 운영, 관리가 업무인 관리자들의 업무 아닌가?
그래,  제쳐두고 
그래서  학기 준비보다 회의가 중요하다.....?!?!?

이건 있을  없는 일이야.

 



그래 봤자 나는 내일부터 휴직할 건데,

그냥 흐린 눈 하고 모른 척해도 되는 건데...!

평소 이 유치원에서 교육과 관련 없는 업무를 지시

하고 책임을 요구하는 게 부당하다 외쳐왔었고,

아이들 교육에 방해가 된다고 믿어왔던 나는


또 참지 못했다.


마지막 근무일 조차 원감님과 논쟁을 이어갔고,

결국 회의에 오고 싶은 사람만 오라는 말씀에

선생님들의 반은 회의를,

나머지 반은 새 학기 준비를 선택했다.

원감님이 나가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왜냐하면,

나도 솔직히 매번 원감 원장님과 갈등하는 게 부담

되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절대 티 내지 않았지만!





유치원을 마지막으로 나서는 내게 원감님은 쉬고

유치원 일은 다 잊고 건강하기를 응원해주셨다.

항상 그래 왔듯이 미운 사람이지만 고마웠다.



최근 휴직을 이어오던 중, 말씀드릴 사항이 있어

며칠 전에 원감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원감님의 목소리가 달랐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지친 것은 진작이고 이제

영혼마저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용을 전달하고 혹시 어디 아프신지 여쭤보았다.

평소의 원감님이셨다면,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도 충혈된 눈을 하고서도

"타고난 튼튼 체질이라 괜찮다"라고 하실 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모든 희망을 다 잃은 사람처럼 체념한 듯,

"저도 이제 몸이 따라주지 않네요...."라는 말씀에

유치원에서 다 죽어가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대체 얼마나 소진되신 걸까?

내가 휴직해버려서 없는 올해도 정말 우여곡절이

많으셨겠다 싶었다.



미운 사람인데, 날 아프게 만든 데 한몫하셨는데,

원감님을 미워했던 내 마음에 죄책감이 들면서

짠하고, 안타깝고, 가엾고, 애잔했다.

더 이상 예전만큼 원감님을 많이 미워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원감님을 향한 감정이 애증에서, 미움에서

결국 애잔함이 되었다.


원감님 아프지 마세요!!

이렇게 아프시면, 지난날의  모습이 겹쳐 보이면, 저는 원감님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제가 원감님을 원망하고 미워할  있게...!
꼭 건강하셔야 해요!!!!



나는 다시 원감님을 마음 편히 미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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