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닥한 꽃 학생

아직 정이 남아있는 세상이다

by 해봄

3월에 제주에 다녀온 것은 꽃을 보고 싶어서였다.

마치 제주도의 상징과 같은 유채,

요즘 계절에 가장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벚꽃,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의 들꽃을 보고 싶었다.


들꽃은 아무 생각 없이, 혹은 그저 “예쁘다~.”하고

지나치기 마련이지만.

아무 데나 이름 없이 핀 것 같아도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게 들꽃의 매력이다.




들꽃은 동네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있어

여행지에서 그 동네의 들꽃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내가 제주에 도착하니 흐린 날씨가 이어졌다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는 축축한 공기

잔뜩 먹구름 낀 하늘

물론 흐린 날씨여도 산책을 하며 들꽃을 보았지만,


나도 그저 들꽃을 보고

‘예쁘네, 서울에서 못 보던 생소한 꽃이다.‘하고

지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날씨가 기분을 만들기 때문이다.


꽃을 보아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지만

나아졌을 뿐, 나에게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주에 머무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드디어 구름 사이로 해가 들기 시작했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의 힘으로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바로 산책 나갈 채비를 했다.

해가 드는데 나가야지, 어디든 정처 없이 걸어야지.

세수만 하고 나와 동네 깊숙이 들어갔다.

이 동네에서 꽤 오랜 시간 지냈지만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로, 아무렇게나 걸었다.


산책은 아주 오래 걸렸다.

눈에 닿는 꽃들마다 반가웠고, 이름을 묻고 싶었다.

이름을 아는 꽃은 카메라와 눈 속에 가득 담았다.

이름을 모르는 꽃은 스마트렌즈로 찍어보고

길을 걸으며 같은 꽃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렸다.

이제는 이름을 아는 꽃이 되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쪼그려 앉아 꽃을 보고 찍어대는데,

한 아주머니가 내게 와서 알 수 없는 말을 하셨다.

완벽한 제주 현지 방언이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아주머니께서는 내 옆에 쪼그려 앉으시더니

하던 대로 다시 한번 찍어보라고 하셨다.

아마도 아주머니께서는 스마트렌즈를 사용해

꽃 이름을 찾는 게 신기하다고 여기신 것 같았다.


수줍게 용기 내어 “이거 알려드릴까요?”라고 여쭈니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하셨다.

먼저 아주머니의 스마트렌즈로 함께 찍어 보고,

분명 돌아가면 잘 기억이 안 나실 테니

(한 번 들으면 기억이 안 나는 건 당연하다)

스마트렌즈 쓰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드렸다.


아주머니의 표정이 미소에서 함박웃음으로 변했다.

“곱닥한 꽃 학생, 생긴 것도 마음도 말도 곱닥하네. 알려줘서 고마워요!”
내가 장난 섞인 표정으로 답했다
“저 학생 아니고 선생님이에요~”

아주머니께서는

내 눈엔 곱닥한 서울 꽃 학생이야
고마워요! 예쁜 선생님!

하고는 어깨를 토닥여주고 사라지셨다.


대강 좋은 뜻이구나라고 생각은 했지만

뜻이 궁금해서 아주머니가 가시고 바로 검색했다.

‘곱다’는 뜻의 제주 방언이었다.


제주에 와서 며칠을 가라앉은 기분으로 지냈는데,

갑자기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선의를 큰 정으로 돌려받은 느낌.

아직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곱닥하게 살아야지.
나도 누군가에게 아직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리고 나에게 매일 다정하게 알려줘야지
아직은 정이 남아 있는 곱닥한 세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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