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 보이는 제주

나는 아직 베테랑 환자가 되려면 멀었다

by 해봄

이번 봄 제주에서는 컨디션이 썩 좋지 못했다.

도저히 서울 하늘 아래서 숨쉬기 힘들 때

제주도로, 내가 갈 수 있는 서울에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곤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태가 너무 안 좋을 때 도망쳤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는 말처럼

이번 봄 제주는 행복했지만 대체적으로 힘들었다.

아직 덜 자랐고 미성숙한 나를 직면하는 시간이었다.



제주에서 책을 참 많이 읽었다.

책을 읽는 건 내 취미이기도 하지만

외부로부터 받는 자극을 가장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딱이기 때문이다.


움직이고, 먹고, 자고, 대화하는 시간 외에는

모두 책과 글을 읽는 데 사용했다.

가만히 멍 때리고 누워 쉬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서평해야 할 책, 책방에서 산 책, 빌린 책,

지난 학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저장만 해 둔 논문을

10일 동안 다 읽게 되었다.


그 많은 글을 읽는 동안 주어진 현실을 회피한 거다.

낯선 환경과 집단에 적응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며

날 던져놓고는, 회피하며 거리만 두었다.




다정, 친절한데 마냥 가까워지긴 어려운 사람.

내 사회인으로서 장점이자 인간으로서 최대 단점.

필요하지 않은 타이밍에

숨 쉬러 도망친 제주에서 빛을 발하고 말았다.


꾹 닫힌 마음을 열고 싶었고 열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굳게 닫혀있었던 것 같다.

나는 자극 없는 시간이 필요했고,

낯선 집단에 적응하는 연습을 할 시기가 아니었다.

결국 숨을 쉬러 도망친 제주에서 숨을 반만 쉬었다.


모든 경험에는 얻는 게 있다는 걸 알기에.

10일 동안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었다.

열리지 않은 마음을 열었다고 착각하기로.

내가 나를 속이는 걸로.


누군가는 ‘힘들면 그냥 나오면 되잖아?’ 하겠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이 쓸데없는 책임감.

내가 선택한 10일 동안의 환경이니 책임지는 걸로!

마음은 못 열어도 최선을 다해 적응하는 척하기로!

페르소나 부자답게 내 집인 것처럼 행동했다.


겉으로는 내 집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굉장히 불편했고, 모든 게 불편할 컨디션이었다.

그래서 혹시 내가 나도 모르게 예민하게 굴까 봐

언행을 더 조심했다. 이미 표정에서 힘든 게 티가 날

테니 언행이라도 괜찮은 척 하자는 결심.


이런 따뜻해 보이는 차가움에 다른 친구들은

내가 더 불편해졌을지도 모르는데.

더 솔직히는 다른 친구들은 내 우울함과 예민함을

심각하게 느끼지도 않을 텐데.


우울한 모습을 숨기겠다고 무리를 한 것 같다.

내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절망의 시간이었다.


‘아직도 내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구나’

‘환자 주제에 건강이나 신경 쓰지 보이는 부분에

힘주어 신경 쓰고 있다니 참...‘

‘서른 살은 다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나는 사회에 나오면 안 되는 사람인 걸까?’

스스로 나에게 스크래치를 내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직접적인 상처를 주지 않았는데.

나는 아직 베테랑 환자가 되려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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