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오지랖
요즘 취미로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날이 좋으니까, 이런 날엔 산책이 필수니까,
햇빛 쬐며 걷고,
햇살 들어오는 카페를 찾아가 공부를 하곤 한다.
벚꽃이 만개한 지난주 분홍빛 일요일에는
카페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노부부를 만났다.
바깥 풍경을 구경하며 달리는 버스에 앉아있는데
바로 뒷자리에서 어르신 두 분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들으려 한 건 아니지만,
예민한 사람에게 뒷자리 사람들의 대화 정도는
함께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린다.
할머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긴 해?
할아버지: 음.. 여의도, 여의도 공원.. 여의도 교회... 뭐가 이렇게 복잡해
할머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온 거야?
할아버지: 여의도로 가면 꽃 많다고 했어
상황은 대략 이런 것 같았다.
할아버지께서 여의도에 벚꽃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를 데리고 나와 버스를 탔는데,
혼란스럽게도 이 버스는 아예 여의도를 한 바퀴
도는 노선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윤중로에 가시려는 것 같았다.
할머니께 꽃구경을 시켜주려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감동이었고, 보지 않고 앞자리에서 듣고만 있었지만
정말 듣기 좋은 대화였다.
물론 현실의 두 분은 퉁명스럽게 말하셨지만..!
작년 윤중로에 벚꽃 구경을 다녀오신 우리 부모님이
떠올랐다.
꽃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며
사람이 많아서 걷기조차 쉽지 않았다며
그래서 벚꽃 사진은 실패하고 조팝나무꽃과 사진을
찍어온 우리 부모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뒷자리 노부부의 투닥거리는 모습조차 소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설렘을 함께 간직하는 느낌.
그래서 큰맘 먹고 오지랖 넓게 행동했다!
뒤로 몸을 돌려 “여의도 윤중로 벚꽃 보러 가세요?”
라고 물어보았더니 반가운 기색으로 끄덕이셨다.
다행이었다.
이 작은 오지랖을 호의로 받아주셔서!
마침 바로 위에 노선도가 붙어있는 자리였다.
보면서 여기서부터 저기 정류장까지 다 여의도라고
윤중로 벚꽃길은 여의나루 정류장에 내려서 앞으로
쭉 가는 길이라고,
다른 곳에서 내리면 아파트랑 빌딩만 있다고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경청해 주셨다.
할아버지께서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잘못 내렸으면
할머니께 혼쭐이 날 뻔했다고 웃음을 지으셨다.
너털웃음을 지으시는 할아버지와 멋쩍어하시는
할머니, 두 분의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우리 부모님도, 나도 저렇게 나이 들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살짝 고민했지만, 여의나루역에 내리면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이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버스가 역에 도착하는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고,
예쁜 꽃구경을 기다리는 두 분의 설렘을 잠시나마
지켜드리고 싶었다.
대신 혹시나 실망하실까 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윤중로엔 벚꽃도 많지만 조팝나무꽃도 예뻐요!
조팝나무꽃도 구경해 보세요!"
그리고 나는 내릴 곳에 도착해
노부부께 즐거운 꽃 구경 하시라고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카드를 찍고 버스를 내리는
순간까지 고맙다는 인사를 해 주셨다.
두 분의 꽃구경은 어떻게 끝났을까?
혹시 사람이 너무 많아 놀라셨더라도,
행복을 느끼는 하루를 보내셨으면 좋겠다.
버스에 내려 윤중로에 도착하기까지의 설렘을 듬뿍
즐기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