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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May 14. 2023

택배에 얹혀사는 유치원

필요한 아이들에게 가지 않는 택배

매번 학기말, 신학기 준비 시즌마다

나와 우리 유치원 선생님들을 놀리곤 했다.

우리는 ‘쿠ㅍ걸’, ‘OO통운’이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속엔 자조적인 웃음뿐이었다.

그런 자조적인 웃음을 우리는 흔히

‘헛웃음’이라고 말한다.


교실 하나를 몽땅 비워 그 안을 택배 산으로 채워야

할 만큼 택배에 얹혀살았다.

내 키보다 택배를 높이 쌓을 초능력이 나에게서

나온다는 신세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당연히 지금은 택배를 쌓기는커녕 옮길 힘도 없다.




하루 종일 택배 뜯고, 택배 주문하고, 택배 기다리고

택배 정리하는 나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서랍 안에 항상 목장갑이 있는 것도...!

칼이 무서워 가위로 택배를 뜯는 편인데

가위에 온통 테이프와 운송장의 흔적이 남은 것도...!


가장 어이없는 점은,

새 학기 준비를 하며 늘 택배와의 전쟁을 치르는

시간이 헛웃음이 나도 가장 행복했다는 것이다.

교구를 사고, 예산이 남아 또 사고, 택배를 쌓고,

택배 산속에서 물건을 찾아 검수를 하고,

박스와 비닐을 정리하며 손에는 이유 모를 베인

상처들이 가득하지만, 그나마 행복했다.

택배 안에는 아이들을 위한 교구가 있으니까.




매일 돌봄 교실로 쓰느라 교실이 비는 시간이 없어

새 학기 교실 환경 준비도 못 하는 상황,

입학하는 그날까지 여러 이유로 우리 반 명단은

변경되는 혼란스러움의 향연, 변경될 때마다 다시

정리해야 하는 온갖 환경 인쇄물과 서류들.


그리고 왜 하는지 모르겠는 각종 대장, 없던 대장도

 기어이 만들어내는 2020년대의 공립단설유치원.

계획으로만 끝날 것 같은 운영계획서의 무한 수정,

우리 반 운영은 계획하지 못한 채

유치원 운영계획서 책자만을 편집하고 있는

출판업계에 잠시 몸담는 시간.


이 모든 것들은 ‘새 학기 준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교구 구입, 택배 검수가 그나마 교사다웠다.

언뜻 보면 전문성 없이도 할 수 있는 노동 같지만

택배 정리가 그나마 아이들을 위한 일 같았다.

방학에 나와 편한 복장에 목장갑을 낀 모습이라도!




학사가 끝난 2월에 난데없이 택배가 산처럼 쌓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예산 털어야 하니까

예산을 쓰기 위해 애쓸 때 내가 공무원임을 느낀다.

많은 예산을 학기말에 다 쓰기 위해 애를 쓰면서

(물론 나는 아이들 교구 사는 일을 사랑한다)

행복하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그러게, 학기 중에 사고 싶은 자료, 교구 다 사게 해 주지.”
“왜 학기 중엔 작은 자료 하나 사는 것도 트집 잡으면서 연말에는 남은 예산을 몽땅 털게 만드나? “
“예산을 학기 중에 사용했다면 우리 반 아이들이 원하던 교구를 다 살 수 있을 텐데, 모두 다음 해
아이들에게 주는구나. 짠한 내 아들 딸들. “



예산 0 만들기가 특기인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사 주느라 학급비가 매년 모자랐다.

학급비는 우리 반에게 책정된 예산이라 자유로웠다.

하지만 교재교구 구입비를 쓰는 건 쉽지 않았다.

당연히 그 많은 교재교구 예산도 학기 중에 찬찬히

써서 연말에 0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자신감일 뿐이고,  윗선에서는

선생님 반이 교재교구를 구입하면, 다른 학급도 같은 액수를 사용해야 한다.
교재교구를 지금 샀다가 학기 말에 예산이 부족하면 어떻게 책임을 질 건가?
(그럴 일이 없을 만큼 예산이 많이 남았을지라도)
그걸 꼭 지금 사야 하나? 교육적 가치가 있나?
꼭 필요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봐라.

이런 이유로 항상 굴복했다.

다른 선생님에게 부담을 주기도 싫고,

아무리 교육적 가치와 필요성을 주장해 봤자 결국은

결재 안 해줄게 뻔하니까!


이런 사소한 일들이 하나하나 쌓여 커다란 무력감을

만들어 냈다. 어쩌면 지금 병에 기여했을 수도..

아니다. 크게 기여했다.




3월 부로 휴직을 앞둔 그 해 2월에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예산을 털고 택배를 뜯고 검수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방학에 편한 차림으로 나와

천문학적 액수의 교구를 사고, 택배를 뜯었다.

윗선에서는 (그제야) 무리하지 말라며 말리셨지만,

그건 온전히 나를 위한 일이었다.


원래 이 교재교구 예산은

우리 반에게 주어진 예산이니까,

내가 굴복하는 바람에 우리 반은 누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그 예산을 다 쓰고 가고 싶었다.

다음 해 아이들이 좋아하기를 바라며!

이미 졸업해 버린 우리 반 아이들이 그렇게 원하던

교구 택배를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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