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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Jun 25. 2024

아버지와 6.25 전쟁

  국가 유공자가 되다

매년 6월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희생을 당한 국가유공자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호국보훈의 달이다

1950년 6.25 전쟁이 반발했던 시기에  내 부친도

2사단 양구전투에서 공산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

허벅지에 총상을 당했다


그 당시 이등중사로. 전쟁에 참전했던 부친은

전쟁 중 전역도 되지 않아  6년 정도 군 복무 후

휴전이 된 후 전역하였다


 가문에서는 장손과 종손으로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고향에서 중매로. 어머님을 맞선으로 만나 결혼하셨다

그렇다 보니 아버지는 전쟁터에 계시고 어머니는  남편 없는  시댁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면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고 한다


치열했던 종전 끝에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오신 후 어머님과 함께 농사를 지었지만

대가족인 우리 집안에서 종손과 장남으로 종갓집 맏며느리로 많은 고생을 하셨다

(군 복무중 정기휴가때 약혼한 부모님 사진)

할이버지는 당신의 아들인 내 아버지가 전쟁 중 총상을 당해  상이군인으로 보훈처에 등록하면 장애인이나

ㅇㅇ취급받으면 집안 망신이라고 국가유공자 등록신청을 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아버지는 6,25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공산군한테 총상을 당했지만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기에 정부에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본인이 국가유공자 신청을 해야만 군의관과 보훈부에서 검증을 할 것인데 신청을 하지 않았으니

보훈연금이나 유공자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해

대가족인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등

가족이 많아  먹고사는 게 항상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해  내가 현역사병으로 군복무 3년을

마치고 전역하여 사회생활을 하던 20대 중반에

지인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국가유공자 신청을 해서

다행히 국가유공자가 되었다ㆍ


다행히 아버지가 전쟁 중 총상을 당했던 자료가

국방부에  기록되어 있어 천만다행으로

아버지는  전상군경 상이 6급으로  한창 늦은 연세에

6,25 참전. 상이 6급. 국가유공자로 심사분류 확정되어

이후부터 매월 적은 금액이나마 보훈연금이 지급되었다


국가유공자 자녀는 대학 끼지 정부지윈이 되어 무상

교육인데, 무지에 의해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아

세상을 너무. 빨리 떠난 누나의 최종학럭은 초등학교 졸업. 동생들도. 중학 또는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국가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아 집안 살림의 빈곤함은 물론 우리 7남매도

보훈혜택을 받지 못해 상급학교 진학을 접고

공장이나 산업현장에 어린 나이에 뛰어들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그 당시 공무원의 월급이 박봉이었지만 작업복 대신 깨끗한 와이셔츠와

양복이나 잠바를 입고 깨끗한 복장으로 근무하는

면직원과 시골 군청 공무원들을 보면서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공무원시험에 도전하여 군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계속 독학해 서너 개 직렬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다행히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초급공무원이

되어 젊은 시절 배우지 못한 한을 풀어 보고자

통신강의와 가끔씩  출석하여 시험을 보고 학위를 받고

졸업하는 방송통신대와 학점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늦은 50대  초반에 대학원을 다녔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마음대로 배우지 못하고 생을 달리 한

누나와 남동생 둘이 가엷다

(2사단 양구 전투에서)

물론 대학에서는 국가유공자 자녀로 보훈장학금을

받아 학비를 면제받고 늦깎이 졸업했지만

공부도 잘했던 누나는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시골에서 일만 하다가 농촌으로 결혼해 농사를

지으면서 고생만 하다가 50대 초반에  암에 걸려

고생만 하다가 별세했으니 ㆍㆍㆍ


아무리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고생만 하다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두 남동생들이

아버지의 국가유공자로 보훈혜택과 보훈장학금을

받았더라면 인생이 달라질 수 있었고, 시골깡촌에서 살면서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것인데.......

 또한 누나와 동생들도  하늘의 별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조국의 독립과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희생당해

국가유공자가 되면 지금은 많은 혜택과

보훈연금이 매월 지급되지만

 6,25 전쟁 이후에는 경제도 어렵고. 국민소득이 60달러 정도 되었다고 하니

국가 유공자에 대한 보훈도 열악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동안 모든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살아와 국민소득도 6.25 전쟁

이후보다 600배 더 많은 3만 5천 달러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행히도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유공자들이 어느 정도는 기본 생계를 유지해 다행이다.


그래도 아직 우리 주변에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국가유공자들이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분들을 존경하고 예우하고 보살펴야 할 것이다

           (양구 지구 동부 전선)                                                                              (영웅의 제복)

 * 6.25전쟁은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 불린다.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국군은 북한의 앞선 병력과 무기에 밀려 한달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이어 미국 주도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열려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유엔군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자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명 피해가 약 450만 명에 달하고, 남한의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남북한은 휴전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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