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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Jul 06. 2024

정 직 해 라

  -남에게 피 눈물 나게 하면 안 된다-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

중학교 졸업 후에는. 리어카를 끌고 새마을 사업을 하러 집에서 멀리 떨어진 도로개설작업에 참여하였다


1970년 그 당시 새마을 사업 노동대가로 받은 하루 일당이 8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에서 4킬로 떨어진  새마을 사업장에 어머님이

밥을 지어 싸준 하얀 쌀보리 혼합 양은 밴또(도시락)를 준비해서 옆집에서 사시는 큰 작은아버지를 따라

석교마을 새마을 사업장으로 갔다


겨울철이라 양은도시락이 식어 버리면 먹기 곤란할까 봐 같이 일하는 이름 모르는 아재집 안방

방바닥에 준비해 온 양은도시락을  놔두고 이불로

뒤집어 씌워 놓고 점심때  허기진 배를 채우려 밥을 먹으면 온기가 있었다


이렇게 가난했던 시절들을 보내면서 힘들게 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힘든 일 궂은일을  다 하면서

1985년 그 당시 박봉이었던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었다



공무원이라고 해봐야 첫 월급은 10만 원으로 매월 월세를 내고 나면 한 달 생활이 빠듯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신용카드도 없었고 은행이나 제2금융권에서 돈을 빌리려면 항상 연대보증을

요구했고, 연대 보증인이 공무원(공직자)이면 채권자는 쌍수로 대환영이었다.


1985년 9급 말단 공무원에 합격해 점심값을 절약하기 위해 집에서 매일 도시락을 준비해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근검절약으로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근검과 절약생활을 하면서 매월 받는 공무원 월급 10만 원으로 월세 5 민원을 내고 나면

한 달 생활비가 빠듯하지만 분기별로 지급되는 상여(보너스) 금과 연 2회 지급하는 장기근속 수당 등으로

어려운 생활이 숨통이 트였다.


이러한 찰나에 몇 명 되지 않은 시골 국민학교 동창이 이자를 주겠다고 돈을 빌려 달라고 사무실에 찾아와

사정을 해 이자를 받으면 쉽게 돈을 모아 전세를 얻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러한 잘못된 착각으로 동창 00에게 돈을 빌려쥬 기 위해 같이 근무하는 사무실 동료들에게 부탁하여

동료들에게 돈을 빌려 1년 치 봉급인 100만 원을 빌려 주었다.

또한, 친구가 보증을 서 달라고 끈질기게 부탁해서 고향에서 아내를 잃고 다른 여자와 재혼해서 살고 있는

친구의 아버지와 봉천 전화국에서 전화통화했다.

내용은 친구가 돈을 갚지 않으면 논농사도 많이 짓고 돈도 많은 친구 아버지가 아들 대신 돈을 갚아주겠다는

전화로 약속했는데 친구는 본인이 운영하는 중구 인현동 인쇄소에 물건과 자취방 물건을 다 빼서 도망

가 버렸었다.


이러한 사실도 전혀 모르는 체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초등학교 동창의 100만 원에 대한

연대 보증이 내 앞으로 서 있으니 돈을 갚아라는 압류가 내 봉급에 들어왔다..


죽마고우 같은 시골학교 동창은 반에서도 1등을 하던 친구라 두뇌도 좋고, 사교성도 좋았는데

이러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친구나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고의적으로 부도를 내 버리고 잠적해

버렸다.

 

이러한 상황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안면식도 없는 사람으로부터 내 봉급 10만 원에 압류가 들어와 1년 동안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여기저기서 사기를 치고 다니면서 골프와 여자 등 향응을 즐기고

잠적해 버렸다.


 월급에 압류당한 나는 지칠 대로 지치고, 경제적으로 힘들어 내 압류를 풀고자 이곳저곳 수소문하니

 경찰서에 고발하라고 하여, 수사과 담당 조사관이 돈을 전부 받아 줄 테니 "고소를 하라"라고 하여

 돈 문제가 해결될 줄 알고 경찰관 말만 믿고 볼펜으로 몇 줄 써서 고소장을 제출했다.


경찰수사와 검찰청 와서 검사가 조사를 받아라고 하여 검사실에 들어갔더니 담당 검사는

고소를 취하하라고 압박했다.

검사의 취지는 "아무리 그래도 고향 동창을 고소했으니, 2시간 이내에 고소 취소하지 않으면 나를

구속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돈 떼이고, 월급에 압류받아 봉급도 차감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억울해서 고소취하를

하지 않았더니 2시간 동안 검사실 옆에 감금한 나를 불러 뺨을 때리더니 무고죄로 경찰서에 유치

시켰다.


그 친구와 이 사건에 연관된 시골 초등학교 선배는 전과이력도 있었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 다니면서

 결국은 기소중지가 되다가 사기죄와 횡령죄로 로 구속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가 항소해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고 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초등학교 선배라고 하는 사람의 작은 아버지는 서울구치소에서 교도관

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나에게 사기를 친 친구의 가까운 친척은 서울 모법원에서 근무하는 법원직

공무원이었는데 법무부와 법원직원으로 부탁을 해서 나에게 고소취하를 강제로 하게 했던 모양이었다


 친구는 이런 나쁜 습관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사업을 하다가 금융권에서 융자를 받아 꽤 괜찮은 건물을

 구입했는데 몇 년 전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서 수십억을 벌게 되었고, 이 빌딩에 본인 사무실을 차려

 본사를 차렸다고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남의 눈에 핏눈물을 흘리게 해서 그 돈을 바탕으로 부동산 투자를 해서 거부가

 되어 고향에 내려가서는 마침, 본인이 자선 사업가처럼 행동하면서 시골 학교나 행정기관에 기부도

 하면서 선량한 사람처럼 위선을 부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억장이 무너진다.


 며칠 전에 성악가 김동규 님이 티브에 출연해서 이야기하는데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못 받은 돈이 100억이 넘는데, 사기 행위를 그 사람은 마치 본인들이 자선 사업가인양 사기를 친 돈으로

 불우이웃 돕기나 00 성금을 내더라 "라고 방송하는 것을 봤다.


 정말, 우리 사회 이웃에는 남을 속이고 사기를 치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눈을 크게 떠도 당하는 사회이다.

  그렇게 여론을 들끓게 했던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전세사기도 마찬가지이다.

  지능이 좋고 대범한 이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상대로 핏눈물을 흘리게 한다.

  

  남을 도와주지는 못할지라도 남을 헤치거나 피해를 주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어머님이 생존해 계실 때 항상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라, 성실하게 살아라.

  나쁜 친구는 절대 멀리 해라"라고 하시던 내 어머님 말씀이 자꾸 생각난다.


  어머님이 생전에 "나에게 사기를 쳤던 그 친구는 절대 만나지 말고 교류하지 말라"라고 하셔서

  유훈이 되어 사기에 가담했던 친구들과 고향 선배를 보지 않기 위해 초등학교 동창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고, 향우회에도 절대 참석하지 않는다


  지금도 보면 나에게 사기치고 횡령을 했던 나쁜 동창과 선배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향우회도

  참석을 잘하고, 툭하면 국내 골프와 해외골프 치러 자주 나가고 있다.


  나에게 사기를 치고 도망가고 돈도 갚지 않고 감옥에 가 변호사 선임해서 집행유예로 출소해 어떻게

  건물을 사 운 좋게 거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냥 씁쓰레하다..

  그래, 잘 먹고 배 터지게 잘 살아라....  대신 후대에 너의 자손도 사기당해 핏눈물 흘려 보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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