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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Sep 12. 2024

막냇동생

  그리운 남동생

초가집도 없애고 비포장도로도 확장하던 1960년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시절, 시골 사람들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논, 밭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살아갔다.


 그 당시는 노동력이 부족한 탓인지 한 가정에 보통 자녀들을

 5∼6명씩 낳아 힘들게 키우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도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예외일 수 없었다.

집은 가난했지만, 우리 부모님도 4남 3녀의 형제자매를 낳아 키우셨다.

 나는 장남이고 동생 병이는 4남으로 막냇동생이었다.


그렇다 보니 나와 병이는 무려 16세나 차이가 난다.

그렇다 보니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막냇동생은 어린 꼬마였기에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다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자그마한 산골 마을이었다.

 고개를 들면 하늘만 보이는 심산유곡의 땅,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이다 보니

 초등학교와는 거리가 10리 길이요, 읍내와는 30리 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중학교 입학 후 읍내에서 자취생활을 하게 됐다.

매주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농사를 짓던 고향으로 가기 위해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속 길, 언제나 무서워했던 묘지 옆을 지나

고향 마을에 들어서면 가족들은 참 반갑게 나를 맞이해 줬다.

(사촌 동생 수호ㆍ막내동생 병이 남동생 응삼)


어린 형제, 사촌들과 함께 논밭에서 비료를 뿌리고 잡초를 뜯고 뙤약볕에서 농약을 치던 아버지가 든 분무기 줄도 잡아 드렸다. 아직도 그때 그 시절이 생생하고 그립다.


 이렇게 들녘에서 일하다 해 질 무렵 키우던 소를 끌고 나이 어린 동생들과

소 꼴을 하러 가던 그 시절이 몇 년 전 같은데 벌써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너무 빠르고 야속하기만 하다.



검정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지만, 농사를 짓던 부모님을 도와 드려야 하니 공부는 뒷전이었다. 무쇠솥에 밥을 짓고 아궁이에 나무를 집어넣어 성냥으로 불을 지펴 군불을 모아 잠을 자는 방바닥이 따습도록 온기를 넣어야 했다. 지게와 갈고리를 들고 산으로 가 소나무 잎을 모아 키보다 더 큰 나뭇짐을 메고 동생들과 함께 힘겹게 집에 돌아오곤 했다.



어린 나이에 동생들과 함께 일을 하고 나면, 금방 허기지고, 배가 고파 고구마와 감자를 삶아 먹고, 구워 먹고, 농번기에 군말 없이 힘들게 일하셨던 부모님 일을 도와줬던 동생들이었는데 지금은 함께하지 못한다. 교통사고로 남동생은 떠났고, 막냇동생도 23 년 전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60대 중반인 나는 동생들과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몇 남지 않은 사진으로 대화를 나눠본다. 너와 함께 고사리 같았던 손으로 우리 형제들이 땀 흘리며 추수와 탈곡, 새끼꼬기도 했었지!! 여름 시작 전 함께 했던 모내기, 겨울이면 고드름 따먹기, 가을엔 쥐불놀이, 날씨가 화창한 날에 하던 자치기 놀이, 숨바꼭질, 알밤 줍기 모두 그 손짓 눈빛 하나하나가 엊그제 같은데 가슴이 아리도록 그립구나.

            (남동생 응삼 사촌동생 수호 막냇동생 병이)



추수 끝난 논, 밭에 나가 벼 이삭 줍기, 고구마와 감자 캐고, 참깨 털던, 배는 고팠지만, 추억이 많던 그 시절들이 왜 이렇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그 고사리 같던 막냇동생 병이! 너의 모습이 참 그립구나. 보고 싶다. 지금도 몇 장 되지 않은 너와의 사진을 바라본단다.



큰형인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역 사병으로 입영하기 전에 양복을 입고 사촌동생 수호와 친동생

들에게 찍어준 사진을 보면 해맑은 모습인데 왜 이리 빨리 형 곁을 떠났니?

너와 함께 시골 간웅국재를 넘기 전에 함께 찍은 사진은 46년 전

국민학교 1학년 여덟 살짜리 코흘리개 아이였었는데…

이제는, 사랑하는 내 동생 막내 병이도 다시는 볼 수가 없으니 세상이 참 쓸쓸하고 서글프다.

(주특기가 전차 운용병이었던 막내동생)


* 병이었던 막내동생

  서울 인근 가평 현리에서 포병 병사로

 군복무를 했다

  현리에 주둔하는 부대가 맹호부대로

  알고 있는데 내가 서울에서 직장 재직중일 때

  현리 신병교육대에 입소하여 훈련중일 때

  어머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면회를 갔다

  면회 후 부대 밖으로 데리고 나와 점심을 함께

  먹은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날이 바로 따뜻한 여름날로 기억하며,

 막내이었기에 순하고 착한 동생이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 애석하고

원통스럽다


 막냇동생이 현역병으로 갓 제대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 쉽게 취직이 되지 않아

  언젠가는 내가 소개해준 여의도 기업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추석명절이 되어 은행에서는 아르바이트생인.         남동생에게도 2~3만 원 되는 선물을

 한 개씩 지급했나 본다ㆍ

 그 당시 막내동생이 살던 집근처에는 여동생이

 살고 있었는데 추석 전날 은행에서 받은 선물을

 우리 집으로 직접 가지고 왔었다

 

  나는 막냇동생에게 왜

 , 누나한테 주고 오지. 힘들게 들고 왔냐? 고 물어보니

  큰형이 부모 같아서 당연히 들고 왔다. 고 말했다


  이렇게 여자 아이처럼 순하고 착해

  언젠가는 동생을 데리고 나가 단둘이 삼겹살에

  소주를 사주면서 대화를 나눴더니

  동생이 말하기를

  . 이 세상에 큰형이 최고로 좋고 형처럼 좋은 사람

    이  없다! 고 말했다


   확실히 막내라서 그런지 여자아이같이 너무 순하고

  착해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어린 조카인 내 딸들은

  삼촌! 삼촌! 하면서 너무 잘 따르고

  조카들이 업어주라고 하면 싫은 기색 없이 업어주던

  착하고 좋은 삼촌이었는데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로 이 좋은 세상을  떠나 버렸으니 나란 존재는 질질하게도 형제복도 아버지 복도 없는 사람 같다


 이제  막냇동생은 내 곁을 영원히 떠나가 버렸지만

 색 바랜 앨범에서 몇 장 되지 않은 동생의 사진을

  정리하면서 자주 사진 속의 동생을 바라본다

  

(동생 금채의 장례식때 영정을 든 막내동생 병이)
(막내동생 병이와 정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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