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학습관에 와서 조선의 역사와 행정조직인 부군현 면 조직에 대해 알아본다.
가장 최근인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내가 살던 조그마한 산골에서 옆집에 거주하시는 윗대 할아버지께서
면장을 하신 걸로 알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면장과 순사제도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아 자료를 찾아보니 그 당시의 면장은 지금 지방행정
사무관이 맡고 있는 면장보다 더 권한이 막강했던 것 같다.
내 아버지는 1931년생으로 현역사병으로 징집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역(제대)도 되지 않아 전쟁이
한참 끝난 이후에 전역하여 그 당시 계급인 이등중사, 지금의 병장 계급으로 전역하신 것 같다.
이렇게 우리 집은 아버지부터 작은 아버지 등 모든 형제들이 현역으로 군 복무를 하다 보니 젊은 청년이
시골 농사일에 필요했을 터인데 다들 현역병으로 강원도와 경기도 최전방으로 징집되어 군대에 갔으니
아버지가 군 생활할 때 어머님이 많이 고생하셨다.
이러한 반면에 면장이셨던 옆집의 할아버지는 자녀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고, 고등학교와 대학도 보내
서울에서 농협지점장이나 시골농협에서 상무나 전무로 퇴직하고, 자녀들도 공부시켜 서울대와 일류대에
보내 손자들이 의대교수나 의사 등 잘 풀렸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유교사상과 한문을 집과 서당에서 배우게 해 결국에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
자녀들과 자손들이 특별하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어떻게 하든 어렵게 공부해서 행정 사무관 자리까지
올라 지금의 면장급으로 퇴직하면서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의 면장과 그 권한에 대해 비교 분석해 본다
조선시대 후기의 지방제도는 도부와 군현(郡縣)을 중심으로 한 지방제도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군(郡)이 지방행정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동리(洞里)는 향촌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자치 기능이 강했다. 이에 비해 그 중간에 자리한 면(面)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존재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진행되면서 우리나라의 지방조직도 식민지 통치에 적합한 말단 행정기구를 수립하려는 일본 측의 의도에 따라 크게 변화했다.
갑오개혁에서 군의 수령으로부터 경찰권과 재판권이 분리되었다. 또 통감부 시기에는 재무기구의 독립과 함께 징세권이 회수되므로 전통적인 군의 기능은 해체되고 군수는 단순한 행정관으로 변모하였다.
면은 전통적으로 수행해 오던 징세기구로서의 기능을 계승하여 식민지 재무기구의 하급단위로 재편되었고, 국가주권이 해체된 상태에서 치안행정의 보조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담당했다.
일제로서는 행정 재정적 측면에서나 치안유지의 측면에서 가장 통제가 용이한 면에 주목했다. 일제는 면을 가장 중요한 지방행정단위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군현제하에서 발전해 왔던 공동체적이고 자치적인 성격은 부정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면을 사실상 식민지 행정기구로 법제화했다.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 지방관관제’를 발포하여 면을 부군아래의 행정구획으로 확정했다. 아울러 1910년 10월 1일에는 ‘면에 관한 규정’을 발포하여 기존의 면장을 판임관에 임명해 그들을 관료기구로 편입했다. 이렇게 면 통치에 대한 기본원칙을 정한 일제는 각종 법제적 조치와 행정지침을 통해 지방행정기구로서 면의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조선면제’ 수립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부군면의 통폐합은 토지조사사업과 같은 시기에 시행되었다. 이는 구역확정이 필요한 일이므로 토지조사의 결과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직후 총독부 내에서는 식민지 행정에 적합한 면제의 방향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 여러 방안이 제시되어 논의했지만 일단 그 전제가 되는 부군면의 통폐합을 먼저 실시하면서 면제의 최종적인 정비를 해 나가기로 했다.
통폐합의 기준은 세부담의 불균등 문제의 해결과 구획의 지리적 불균등성의 해소였다. 이것은 식민지 통치에서 지역이 식민지통치에 필요한 노력의 동원과 재정부담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총독부의 이러한 지방재편은 1905년 이후 일본의 지방행정 재편을 모델로 삼고 있었다. 근대 일본의 지방행정제도는 일본 내무관료가 인정했듯이 유럽에서는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자치제도가 발전할 수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그러한 전통이 없고 국가행정의 편의를 위해 자치를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일본에서는 1905년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부족해진 재정부담을 일본국민에게 부담시키게 되고 이 과정에서 농촌의 지방행정은 담세능력을 지닐 수 있도록 산업적 기반을 갖추고, 일본신민을 만드는 교육적 기능을 지니며 우수한 병사를 배출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재편되어 갔다. 이러한 일본의 지방행정 기능의 재편은 조선총독부의 지방제도 창출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인다.
초기 조선총독부 지방행정 재편을 주도한 인물인 야마가타 이사부로와 우사미카츠가 일본의 내무관료로 일본의 지방행정을 추진한 인물이고 기타 그 아래의 인물들도 모두 일본의 지방행정의 책임자로 경험을 쌓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1910년에서 1913년 말까지 전국적인 부군면의 통폐합에 따라 구역변경에 따른 지명과 지역명이 새로이 만들어졌고 종래의 전통적인 지명이 많이 사라졌다.
일본식 지명이 많이 도입되었고 우리나라의 전통지명은 의미 없는 글자의 조합으로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는 지명의 해체를 통해 한국인을 전통에서 단절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거두었다고 보인다. 앞으로 지명의 복구는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1910년에서 1914년까지 전국적인 부군면의 통폐합 결과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1914년 4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상과 같이 부군통폐합과 명칭변경을 거쳐 식민지지방지배의 기반을 마련한 후 1914년 4월 1일 부제(府制)의 실시와 1917년 면제(面制)의 시행을 통하여 법령을 통해 지방제도의 재편을 완료해 나갔다.
면사무소가 지금은 행정복지센터로 변경되었지만 시골의 면장실을 가보면 땅값이 저렴해서 그런지
면장실도 넓고 크다. 대도시의 동장실은 소규모이고, 서울의 일부 자치구에서는 면장과 동급인 동장실도
폐쇄시킨 주민센터가 있지만, 똑같은 직급인 일반 지방행정사무관이 면장과 동장직위인데 대우받는 게
서울과 지방이 다른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