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근대화와 산업수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좁은 시골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집도 허물어 기와집으로 개량하던 1960년대에 마을이라야 다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외딴 산촌에서 살았다
마을도 작고, 가구수도 적어 국민학교를 동급생도 없이 혼자서 다녀야 하는 고통도 많았다
한적한 시골 도로는 울퉁불퉁 굴곡이 심해 나무로 만든 수레바퀴 달구지를 타거나 리어카를 앞에서 끌고 비포장도로 10리 길을 오고 가면서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시절,
시골 사람들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허허벌판의 마을 뒷산 황무지를 곡괭이와 삽으로 밭을 만들어 옥수수와 고추, 참깨 야채들을 심어
경작하면서 힘들게 논, 밭농사를 지으며 우리 부모 형제들이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갔다.
그 당시는 노동력이 부족한 탓인지 한 가정에 보통 자녀들을 5∼9명씩 낳아 힘들게 키우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도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예외일 수 없었다. 집은 가난했지만, 우리 부모님도 4남 3녀의 형제자매를 낳아 키우셨다.
나는 장남이고 막내 동생 병희는 4남으로 우리 남매 중 일곱 번째 막냇동생이었다.
그렇다 보니 나와 병희는 무려 16세나 차이가 난다.
내가 읍내에서 힘들게 자취를 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막냇동생은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은 어린 꼬마였기에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다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다 보니 등잔불에 등유심지를 꽂아 책을 읽다 보면
글씨도 잘 보이지 않았다
(어릴적 고향 초가집을 그려보다)
마을은 트럭이나 버스도 진입하지 못한 꾸불꾸불한 외진 길로 고개를 돌고 돌아 하늘만 보이는 심산유곡의 땅,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이다 보니 초등학교와는 거리가 10리 길이요, 읍내와는 40리 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중학교 입학 후 읍내에서 자취생활을 하게 됐다.
매주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농사를 짓던 고향으로 가기 위해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속 길, 언제나 무서워했던 묘지 옆을 지나 고향 마을에 들어서면 가족들은 1주일에 한번 만나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어린 형제, 사촌들과 함께 논밭에서 비료를 뿌리고 잡초를 뜯고 뙤약볕에서 농약을 치던 부모님을 돕기 위해 학교수업이 끝나면 비로 긴 분무기 줄도 잡아 드렸다.
모내기 때는 서로 줄을 잡아 일렬횡대로 허리를 굽히면서 모를 심다 보면 어찌나 허리가 아팠던지!
지금도 힘들고 배고팠던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만 그립다.
이렇게 고향 집 들녘에서 일하다 해 질 무렵 키우던
황소를 끌고 나이 어린 동생들과 소 꼴을 베러 가던 그 시절이 몇 년 전 같은데 벌써 55년이란 세월이 야속하게 흘렀다.
너무 지나가는 세월이 빠르고 야속하기만 하다.
13살 검정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던 증학교 시절이었지만, 농사를 짓던 부모님을 도와 드려야 하니 모든 공부는 뒷전이었다.
검은색 육중한 무쇠솥에 밥을 짓고 아궁이에 나무를 집어넣어 성냥으로 불을 지펴 군불을 모아 잠을 자는 방바닥에 온기를 넣어야 했다.
지게와 갈고리를 들고 산으로 가 소나무 잎을 모아 키보다 더 큰 나뭇짐을 메고 동생들과 함께 힘겹게 집에 돌아오곤 했다.
어린 나이에 동생들과 함께 일을 하고 나면, 금방 허기지고, 배가 고파 고구마와 감자를 삶아 먹고, 구워 먹고, 농번기에 군말 없이 힘들게 일했던 우리 남매들!
항상, 일손이 부족한 부모님 일을 도와줬던 동생들이었는데 지금은 둘째와 막내 남동생 그리고 오직 한 명뿐이셨던 누님도 하늘나라로 일찍 떠나 항상
함께하지 못한다.
교통사고로 남동생 두 명은 20대 후반에 먼저 떠났고, 누님마저 50대 초반에 불치병인 암이 찾아와 내 곁을 너무 일찍 떠났기에 생각만 하면 항상 슬프고 보고 싶다
이제, 벌써 70대가 되어 버린 내가 지난 세월들을 되돌아본다.
가정은 먹고살기에 항상 바쁘고 배는 굶주렸지만 형제, 남매들과는 우애가 돈독했다.
동생들은 결혼도 하지 않은 20대에 세상을 떠나고 자상했던 누님마저 50대 초반에 암으로 떠났기에 어린 시절 남동생들과 누님과의 어릴 적 추억들은 소중하다
이제, 몇 장 남지 않은 사진으로 동생과 누나와 대화를 나눠본다.
고사리 같았던 손으로 우리 남매들이 땀 흘려가며 추수와 탈곡, 새끼꼬기도 했었지!
여름 시작 전 함께 했던 모내기, 겨울이면 고드름 따먹기, 가을엔 쥐불놀이, 날씨가 화창한 날에 하던 자치기 놀이, 숨바꼭질, 뒷산에 올라
큰 밤나무에서 알밤이 저절로 떨어지면 이른 새벽부터 나가 알밤을 주워오면 할머니와 어머님한테 칭찬도 많이 받고 좋았었는데 ᆢ
이제는 그 손짓 발짓 눈빛 하나하나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흘러가니 가슴이 아리도록 동생들과 누나가 그리워진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논, 밭에 나가 벼 이삭 줍기, 고구마와 감자 캐고, 참깨 털던, 배는 고팠지만, 추억이 많던 그 시절들이 왜 이렇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그 고사리 같던 막냇동생 병희와 둘째 금채! 그리고 덕순이 누님의 모습이 참 그립다. 보고 싶다.
지금은 귀하고 소중한 몇 장 되지 않은 어릴 적 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ㆍ
큰형인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역 사병으로 입영하기 전 스물한 살에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몸에도 맞지 않은 양복을 입고 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동생들의 모습은 해맑은데 하느님은 왜 이리 빨리 동생들과 누님을 데리고 가 버렸을까???.
남동생들과 함께 시골집 근처 간웅국재를 넘기 전에 함께 찍은 사진들은 지금도 미소를 짓고 웃는 표정인데 55년 전 국민학교 1학년 여덟 살짜리 막내둥이 동생 병희는 코흘리개 아이였었는데…
이제는, 사랑하는 내 동생 금채와 막내 동생 병희, 이 세상에 한 명뿐인 덕순이 누나도 다시는 볼 수가 없으니 세상이 참 쓸쓸하고 서글프다.
나는 이렇게 70대의 삶을 살아가면서 고독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왜! 이리 누나와 남동생들은 내 곁을 너무 빨리 떠났을까?????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떠나 버린 부모님과 남동생, 누님이 항상 그립고 보고 싶지만, 매년 찾아오는 명절이나 여름휴가철이면 더더욱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보고 싶은 형제들아! 왜! 이리 뭐가 급하다고 내 곁을 떠나갔니?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지만 가장 가까운 친척인 숙부님이 농협에서 결재권자인 간부로 근무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연노하신 내 부모님이
많이 의지했던 농협에 재직 중인 숙부님에게 통장과 돈을 맡겼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숙부님이 서류를
위조하여 내. 남동생 두 명의 피 같은 사망보험금인 공제금을 글씨도 읽지도 쓰지도 못한 내 어머님이 수령한 것처럼 수천만 원을 찾아서 착복해 버렸었다
남동생은 하늘나라로 떠나가고 거의 10년이 흘러간 뒤에 어머님이 교통사고로 요양원에 계시다가
별세하시니 내 남동생들의 사망보험금을 착복한
숙부는 돌변하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에게 누명을 씌웠다
막냇동생 장례식 때에는 숙부님 내외분은 두문불출하여 친조카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은
인면수심 하더니 큰 형님인 내 아버지에게 제삿날
할아버지 기 제삿날 참석하시더니 이 양반아! 노망했냐? 고 하면서 덤벼들었다
이런 모습을 자식으로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는 다시는 농협에 재직했던 숙부님을 보지 않고 외면하고 산다
가끔씩 금융기관에 근무하다가 친인척이나 고객이
맡긴 돈을 횡령하다 구속당하는 사례를 뉴스로
많이 접하는데 금융사고가 직원들에 의해 발생하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돈이면 인면수심 하고 별짓을 다하는 현실들이 영
보기 좋지 않다
30여 년 전 내 곁을 떠나간 남동생들과 누나들이
지금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이런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가족들처럼 형제들이 자주
만나 식사도 하면서 외롭지도 않고 인생살이가 참
즐거울 텐데 삼 남매가 일찍 떠나 버리니 숙부들까지 나를 무시하고 남동생들의 사망보험금까지 장난을 쳐 버렸으니 ᆢ
더욱더 떠나버린 두 남동생과 누나가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돈이란! 무엇이길래 삼촌과 조카사이를 멀게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