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과 동부전선 이병장

by 자봉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

올해의 첫눈은 유난히도 굵고 묵직하게 쏟아졌다.

새벽녘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차창과 인도, 사람들의 어깨에 소리 없이 내려앉아 도시를 순식간에 희게 덮어버렸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걸음은 평소보다 한층 조심스러웠고, 염화칼슘을 싣고 지나가는 차량은 분주히 움직였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남들은 불편함을 느낄지 몰라도, 내 마음 한켠에서는 오래도록 덮어 두었던 기억들이 조용히 눈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문득 스무 살 초반의 나 자신을 떠올린다.

덜 여문 청춘의 눈망울로 군문에 들어서던 그날, 1980년 4월 강원도 인제 원통 12사단 병기근무대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

가슴 한쪽에 달린 이등병 계급장 하나가 어찌나 빛나 보이던지,

마치 나라는 존재 전체를 밝히는 하나의 ‘청춘의 불꽃’처럼 느껴졌다.

부대의 정문을 들어서던 순간의 긴장감, 낯선 겨울 냄새, 곧 쏟아질 훈육의 기운까지도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그립다.


강원도의 겨울은 군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곳의 겨울은 참으로 길고도 매서웠다.

눈발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방향을 바꾸어 불어왔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무릎을 넘어 허리까지 쌓여 있었다.

우리는 삽과 곡괭이를 들고 끝도 보이지 않는 도로를 따라 눈과 싸웠다.

간혹 바람이 세차게 불어 눈송이가 얼굴에 날아오면 볼이 얼얼해졌고,

입김이 단숨에 하얗게 퍼졌다가 곧바로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모든 고됨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묵직한 보람이 있었다.


추운 새벽, 전우들과 함께 눈을 치우던 그 순간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각자의 군장과 체온이 어깨에 닿았을 때 느껴지던 그 따뜻함,

함께 걸어갈 때 들려오던 군화의 규칙적인 소리,

작은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든든해지던 그 시절의 동행.

그것은 청춘이기에 가능했던 뜨거운 우정이자,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속내였다.


1983년 1월 3일.

제대하는 날 아침, 나는 그 부대의 정문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고된 훈련과 폭설 속의 나날들, 전우들과 나누었던 웃음과 눈물,

때로는 고향이 그리워 가슴이 저려왔던 밤들까지—

모든 순간이 짧지만 강렬했던 한 시절이었다.

그 시간들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앞으로의 인생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 시절 함께했던 전우들의 얼굴은 한 번도 내 마음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정춘기,

최수준,

최훈영

송순용,

최상문,

어윤정.

한호영

정연칠

이석주병장

전세영 하사

그리고 끝까지 선임들을 챙겨주던 정주진 병장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솟아오른다.

그리움일까, 아니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일까.

눈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이면,

전우들과 함께 겨울 산악지대를 걸어가던 기억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해진다.


동부전선은 참 고요했다.

고요하지만, 그 속에는 긴장과 경계, 사명과 의지가 가득 차 있었다.

더구나 산악부대 특유의 고립된 환경은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주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형제보다 더 가까운 인연으로 묶일 수 있었다.


아…

참으로 그립다.

12사단의 찬 공기,

골짜기를 따라 부는 칼바람,

하얀 눈 위에 줄지어 찍히던 군화 발자국,

그리고 전우들의 묵묵한 뒷모습까지.

첫눈이 내린 오늘,

그 모든 것들이 다시 흰 생각으로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내려앉는다.

마치 잊고 살았던 나의 청춘이

첫눈을 타고 조용히 돌아와

“잘 있었느냐”고 인사라도 건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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