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운동

by 자봉

은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달고 직장을 떠난 지도 어느덧 10여 년이 흘렀다.

40여 년을 쉼 없이 다녔던 직장은 하루아침에 ‘기억의 장소’가 되었고, 나의 하루는 갑자기 느슨해졌다. 현직에 있을 때는 새벽같이 일어나 지하철 첫차나 그 다음 열차를 타고 출근했고, 업무를 시작하기 전 직장 내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뛰고 아령을 들며 하루를 열었다. 운동은 선택이 아니라 습관이었고,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73kg 안팎의 체중과 제법 단단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퇴직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출근이 사라지자 헬스장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운동을 “내일 해야지” 하며 미루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체중계에 올라선 숫자가 61kg을 가리키고 있었다. 몸무게뿐만이 아니었다. 머리가 자주 어지럽고, 괜히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큰 병이 오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슬며시 찾아왔다.


그때 떠올린 것이 걷기였다. 거창한 운동이 아니라, 가장 쉽고 평범한 움직임. 종합복지관과 평생학습관을 틈날 때마다 다니며 오전·오후 시간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일부러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홍대입구역에서 공덕역까지 이어지는 경의숲길이 나의 단골 코스가 되었다. 가로수가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를 걷다 보면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생각은 차분해졌다.


하루에 13,000보. 숫자로 보면 많아 보일지 모르지만, 생활 속에서 걷다 보니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지하철 요금이 무료가 되자, 갈 때는 지하철을 타더라도 집에 올 때는 꼭 걸어서 오게 되었다. 휴일에 결혼식이나 장례식처럼 먼 곳을 다녀오는 날에도 일부러 한두 정거장 전에 내려 걸었다. 걷기는 어느새 목적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몇 년 전 강북삼성병원에서 받은 건강검진 결과는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혈압은 높았고, 콩팥 기능도 좋지 않았으며, 당뇨는 경계선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췌장에 물혹이 있다는 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병원에서는 신장과 췌장 모두 6개월마다 추적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검사 일정표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제는 정말 내 몸을 속일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생활을 더 단순하게 정리했다. 하루 13,000보 걷기를 기본으로 삼고, 식단도 바꿨다. 육류와 인스턴트 식품을 줄이고, 두부와 콩, 계란, 채소, 생선을 중심으로 소식했다.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특별한 약도, 특별한 보조식품도 없었다. 그저 걷고, 덜 먹고, 규칙적으로 살았다.


6개월 뒤 다시 받은 콩팥 검사에서 담당 교수님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뭘 먹고, 어떻게 관리하셨습니까?”

나는 솔직히 답했다.

“하루에 13,000보 이상 걷고, 고기랑 인스턴트 음식 안 먹고, 먹는 양을 줄였습니다.”

교수님은 웃으며 말했다.

“관리를 너무 잘하셨네요. 이제 1년에 한 번 검사하셔도 되겠습니다.”


췌장도 마찬가지였다. 물혹은 더 커지지 않았고, 새로운 병변도 생기지 않았다. 소화기내과에서는 MRI 검사 간격을 6개월에서 12개월로 늘리자고 했다. 숫자와 그래프보다 더 반가운 말은 “지금처럼만 관리하세요”라는 한마디였다. 몸무게도 자연스럽게 63kg 선에서 안정되었다.


이제는 경의숲길, 안양천 둑, 효창공원을 번갈아 걸으며 하루를 보낸다. 아침이나 저녁, 혹은 귀가길에라도 반드시 걷는다. 걷다 보면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땅의 감촉이 느껴진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잡념은 어느새 사라지고,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워진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친목 모임에 나가면 술 대신 물잔을 들고, 삼겹살과 등심이 익어가는 자리에서 채소와 생선을 조금씩 집어 먹는다. 같은 회비를 내고도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건강을 잃고 나서 후회하느니, 지금 조금 손해 보는 편이 낫다. 어차피 이런 모임은 사람을 만나 웃고 이야기하러 가는 자리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람을 만나고, 걷고, 몸을 움직이는 일은 우울감과 외로움을 막아주고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회비 5만 원쯤은 “건강 보험료”라 생각하며 웃어 넘긴다.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걷기는 시간을 빼앗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나에게 돌려준다. 특별한 장비도 필요 없고, 넓은 공간도 필요 없다. 그저 발을 내딛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제 남은 삶에서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다. 99세까지 살지는 못하더라도, 죽는 날까지 ‘팔팔하게’ 살고 싶다. 자녀나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삶, 내 발로 걷고 내 몸을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삶.

오늘도 나는 그 목표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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