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따라 흘러가는 한강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집과 일터를 오가던 수십 년의 세월,
그 시절 나의 하늘은 빌딩 숲에 가려져 있었고 나의 발걸음은 늘 누군가와의 속도 경쟁에 지쳐 있었다.
그러나 은퇴라는 이름으로 마침표를 찍고 나니, 역설적이게도 비로소 새로운 문장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시간에 쫓기는 자가 아니라 시간을 부리는 주인이 되어, 나는 오늘 여의나루 선착장에서 한강 리버버스에 몸을 실었다.
여의나루의 활기찬 공기를 뒤로하고 배가 서서히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자,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답답함이 강바람에 씻겨 내려간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윤슬은 마치 수만 개의 보석을 뿌려놓은 듯 찬란하다. 예전에는 차창 너머로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들이 리버버스 위에서는 오롯이 내 것이 된다. 단돈 3,000원에 누리는 이 사치스러운 풍경을 마주하며, 나는 은퇴 이후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는지를 새삼 실감한다.
망원을 거쳐 마곡으로 향하는 물길 위에서, 나는 인생의 '멋'에 대해 생각한다.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빨리 꺼내며 즐겁게 사는 인생이 가장 멋지다"는 나의 신조는 은퇴 후에 더욱 빛을 발한다.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새로운 경험을 선물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곳간이 그만큼 넉넉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강 수상버스 터미널)
인색함은 마음을 좁게 만들지만, 나눔은 인생의 지평을 넓혀준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온몸으로 깨닫는다.
망원 선착장을 지날 때쯤, 멀리 보이는 성산대교와 월드컵대교의 웅장한 곡선이 인생의 굽이길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가파른 오르막도 있었고 아찔한 내리막도 있었지만, 결국 그 길들이 모여 오늘처럼 평온한 강물 위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11,000보를 걸으며 느끼는 다리의 뻐근함은 내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그리고 내가 여전히 세상을 향해 걷고 있음을 알려주는 훈장과도 같다.
마침내 도착한 마곡나루. 배에서 내려 양천향교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걷다 보면, 발끝에 닿는 흙내음과 풀향기가 정겹다. 은퇴 이후의 삶은 '상실'이 아니라 '발견'의 연속이다.
몰랐던 길을 발견하고, 잊고 지냈던 여유를 발견하며, 무엇보다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진짜 나'를 발견하는 여행이다.
오늘 하루, 리버버스가 남긴 하얀 물보라처럼 나의 인생 2막도 시원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비록 동시대의 배우들이 하나둘 무대를 떠난다는 소식에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기도 하지만, 나는 슬퍼하기보다 오늘 내가 딛고 있는 이 땅과 내가 바라보는 이 강물에 집중하려 한다.
지갑을 빨리 열어 동료들과 웃음을 나누고, 편안한 신발을 신고 끝없이 펼쳐진 한강 변을 걷는 것. 이보다 더 찬란한 인생의 황금기가 어디 있겠는가.
해 질 녘, 강물에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나는 다짐한다. 내일은 또 다른 길을 걷고,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이 즐거운 여행을 멈추지 않겠노라고.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가장 빛나는 주연은 바로 오늘을 기쁘게 살아내는 나 자신임을, 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다음에는
서울식물원의 온실을 구경하고, 지인분들과 식물원 안 카페에서 근사한 '티타임'을 가지며 새로운 것들을 구경하면서 지갑을 빨리 여는 멋진 시니어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