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등산

안산 자락길

by 자봉

겨울 공기는 칼날처럼 매섭지만, 그 서늘함이 오히려 잠들었던 정신을 맑게 깨우는 일요일 아침이다.


날씨가 춥다고 아랫목의 온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몸도 마음도 생기를 잃기 마련이다. ‘움직여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진리를 되새기며, 나는 지척에 있는 서대문 안산 자락길을 걷기 위해 가벼운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 승강장, 육중한 열차를 기다리며 서성이다가 스크린도어 유리문 너머로 무심코 시 한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제목은 ‘인생 통장’. 그 구절들이 마치 내 발목을 붙잡기라도 하듯, 바쁘게 흐르던 시선이 한곳에 멈춰 섰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시간’이라는 화폐가 가득 입금된 통장 하나를 부여받는다고. 참으로 묘한 통장이다. 매일 일정한 양의 지출은 일어나는데, 도무지 그 잔고만큼은 확인할 길이 없으니 말이다.

젊은 날의 나는 그 통장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무한한 줄로만 알았다.


‘열정’이라는 명목으로 시간을 펑펑 쓰고, 내일이라는 이자가 당연히 붙을 것이라 믿으며 하루의 소중함을 가볍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고희를 넘긴 시인의 고백처럼, 인생의 후반전에서 돌아본 시간은 결코 역류하지 않는 강물과 같았다. 추억이라는 카펫 위에는 서툴게 내디뎠던 발자국들만 선명하게 남았을 뿐, 한 번 빠져나간 시간은 단 1초도 재입금되지 않는 엄격한 규칙을 따르고 있었다.

인생의 잔고를 확인할 길 없는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 진실은 조금 서글프다.

내가 마음껏 꺼내 쓸 수 있는 ‘시간의 용돈’이 이제 그리 넉넉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숫자로 찍혀 나오지 않는 잔고를 궁금해하며 불안해하기보다, 아침에 눈을 떠 허락된 하루를 확인하고, 잠들기 전 무사히 보낸 시간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삶을 택하기로 한다.


시는 내게 묻는다. “당신은 오늘 당신의 인생 통장에서 얼마큼의 정성을 꺼내 썼느냐”고.

돈은 잃어도 다시 벌 수 있지만, 인생에서 한 번 지출된 정성과 시간은 영영 사라진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통장에 숫자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라는 귀한 용돈을 소중한 사람과 가치 있는 일에 아낌없이 쓸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지하철역으로 들어오는 열차 소리에 잠시 잠겼던 상념에서 깨어났다. 안산 자락길을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오늘 내가 산행에서 마주할 겨울나무와 찬 공기는 오늘 내 인생 통장에서 지출할 가장 값진 ‘정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안산 자락길 정상인 봉화대에 올라서니 서울 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남산의 우뚝한 모습과 북한산의 웅장한 능선, 그리고 청와대까지 조망하고 나니 가슴이 탁 트인다. 무악정을 거쳐 양지바른 벤치에 앉아 메고 온 배낭을 풀어 놓았다. 겨울 산행의 백미는 바로 이 순간이다.

보온병 뚜껑을 열어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붓는다. 기다리는 동안 따뜻한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바나나와 계란, 그리고 귤껍질을 벗겨 허기를 달랜다.


산 아래 집에서 무심히 먹었다면 그저 평범했을 음식들이지만, 찬 바람을 뚫고 올라와 먹는 이 맛은 가히 ‘꿀맛’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과 커피 한 잔을 곁들이니, 십만 원이 넘는 호텔 뷔페가 부럽지 않은 호사다.


자연이 주는 경치라는 배경에, 땀 흘려 올라온 성취감이라는 양념이 더해졌으니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어디 있겠는가.

서너 시간의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오르락내리락 반복한 탓에 허벅지 뒷근육이 기분 좋게 땅겨온다.

그것은 오늘 하루 내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이자, 내 몸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확실한 징표다.

휴대폰의 걸음수 측정기를 보니 어느덧 2만 보를 훌쩍 넘겼다.

육체는 고단할지언정 마음에는 만족감이 차오른다.

오늘 산행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아직 닫히지 않은 내 인생 통장의 오늘 자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려 한다.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릴 것이다.

“오늘도 소중한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그리고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건강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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