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물결과 찬란한 굿삿

by 자봉

인생의 계절이 어느덧 깊은 겨울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성숙의 빛깔을 띠어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힌 인연의 매듭은 마치 오래 묵은 차향처럼 더욱 그윽하고 향기롭게 피어오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

나는 마곡나루역의 차가운 금속성 계단을 뒤로하고 발을 내딛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서울식물원의 푸른 품 안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평온함을 마주한다


그 곁에는 삼사십 년 전, 젊음의 열기가 뜨거웠던 일터에서 같은 꿈을 꾸며 땀 흘렸던, 나보다 다섯 해를 앞서가며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주셨던 선배님이 계셨는데, 나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서너 번의 발걸음이 닿은 길이었으나 오늘 처음 이 비밀의 정원에 발을 들인 선배님에게 그곳은 마치 지중해의 햇살과 아열대의 습기가 고스란히 옮겨온 듯한 신비로운 신세계이자 경이로운 감탄의 연속이었던 모양이다

(골프도 인생도 샷)



온실의 묵직한 유리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이국적인 풍광과 시원하게 고막을 때리는 폭포수 소리, 그리고 이름조차 다 알 수 없는 천연의 꽃들이 뿜어내는 색채의 향연 앞에서, 머리가 희끗해진 선배님이 아이 같은 순수한 탄성을 터뜨리며 “아, 참 좋다! 어쩌면 이렇게 잘 꾸며놓았을까”라고 연신 감탄하시는 그 목소리를 곁에서 듣고 있자니, 안내를 자처한 나의 마음마저 덩달아 화사한 꽃밭이 되어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네 시간 동안 우리는 식물원을 구경하고 소박한 간식을 나누며 수십 년 세월의 간극을 단숨에 메워나갔고, 꽃은 계절마다 피고 지기를 반복하지만 사람의 오래된 인연은 늙지 않고 다만 깊어질 뿐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가슴에 새기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식물원의 초록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저녁 6시 20분, 나는 또 다른 생동감이 넘치는 만남을 향해 발길을 옮겼는데, 현직에서 여전히 열정을 불태우는 강 사무관과 인생 칠십 고개를 독신으로 묵묵히 걸어오며 동장으로 퇴임한 일 년 선배 강 사무관, 이렇게 세 사람이 스크린 골프채를 잡고 마주 선 그 현장은 낮의 고요했던 초록과는 또 다른 활기찬 초록빛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고수급 반열에 올라 75타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써 내려가는 그들에 비하면, 이제 막 골프라는 세계의 재미에 눈을 떠 106타라는 성적표를 받아 든 나의 실력은 어쩌면 초라하게 비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점수라는 숫자의 굴레에 갇히기보다는 공이 허공을 가를 때 느껴지는 생동감과 젊은 시절 생계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누려보지 못했던 것들을 나이 들어 하나씩 배워가는 이 뒤늦은 즐거움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보너스라고 굳게 믿고 있다


특히나 현직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여유가 있다며 늘 정성스럽게 따뜻한 김밥 네 줄을 챙겨오는 후배 강 사무관의 그 따뜻한 마음씨는 단순한 간식 이상의 위로가 되어, 우리는 예전 같은 부서에서 선거 업무와 인센티브 사업을 위해 밤낮없이 동고동락했던 추억을 안주 삼아 서너 시간 동안 끊이지 않는 웃음꽃을 피웠고, 드라이버 비거리를 늘리는 비책과 클럽 페이스가 열리지 않게 하라는 조언, 그리고 언제나 오른쪽을 겨냥하라는 세심한 지도들이 오가는 속에서 비록 스윙을 반복할수록 어깨와 팔꿈치에 약간의 통증이 올라왔으나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이 건강한 에너지는 그 어떤 통증보다 달콤하고 강렬했다

(마곡 수목원)


다행히 이 골프장은 중학교 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오랜 동창 위 사장이 운영하는 곳이라 친구의 넉넉한 인심 덕분에 저렴한 비용으로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으니, 나를 따라온 선후배들도 모두 만족해하며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이곳에서 다시 모이기로 굳은 약속을 나누었고, 식물원의 자연적인 초록빛 위로 스크린 골프장의 인공적인 초록 필드가 겹쳐진 오늘 하루, 단돈 2만 원으로 누린 이 찬란한 사치는 그 어떤 명품보다 값진 것이며 팔다리의 뻐근함은 내가 오늘 인생이라는 경기를 아주 뜨겁고 성실하게 뛰었다는 인생의 증표 같았다

(서울 수목원)


은퇴 이후의 삶이라는 것이 자칫 적막할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웃음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참으로 보람차고 즐거운 나날이며, 결국 세상이란 결코 홀로 걸어갈 수 없는 길임을, 이웃과 친구들과 더불어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야만 비로소 그 길 위에 웃음도 기쁨도 꽃처럼 피어난다는 것을 마곡의 초록 물결 속에서 다시금 깊이 절감해 본다


앞으로도 당구와 탁구골프 그리고 노래도 부르며

인생후반기는 항상 즐겁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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