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셀

by 자봉

평생을 시계추처럼 살았다. 퇴직만 하면 신세계가 열릴 줄 알았다. 꽃잎 흩날리는 봄날의 눈부신 자유를 꿈꾸며 40년 넘는 세월을 묵묵히 버텼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은퇴의 민낯은 향기로운 꽃자리라기보다, 출구 없는 미로에 가까웠다.

한두 달의 달콤한 휴식이 지나자, 자유는 어느새 무거운 적막이 되어 거실 구석에 먼지처럼 쌓여갔다.

곳간의 곶감을 빼먹듯 통장의 숫자를 지워가며 사는 삶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육체는 아직 꼿꼿하고 머릿속은 현직 시절의 명민함이 남아 있건만, 세상은 나를 '노인'이라는 단어 속에 가두려 한다. 당구장이나 경로당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빛에서 나의 내일을 본다. 생기 잃은 그늘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아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맨다.

다시 일을 해보려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시작부터 낯선 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엑셀로 서류를 제출하라'는 간단한 문장 하나가 가슴을 턱 막히게 한다. 20년 전, 키보드를 두드리며 세상을 무섭지 않게 바라봤던 기억은 이제 구석기시대의 유물처럼 아득하다.


새로 사려니 돈을 달라 하고, 배우려 하니 그조차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 변해버린 세상의 속도는 자비가 없고, 익숙했던 도구들은 이제 낯선 외국어가 되어 나를 시험한다.


칼 빌레마는 노인을 '현자'라 칭송하며 온갖 고난을 이겨낸 유능한 존재라 치켜세웠지만, 정작 현실의 노인은 엑셀 칸 하나를 채우지 못해 쩔쩔매는 서툰 초심자일 뿐이다.


세월이 선물했다는 '삶의 지혜'라는 열쇠는, 디지털로 잠긴 세상의 문 앞에서 자꾸만 헛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배움을 갈구한다. 이름뿐인 복지관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나의 뇌세포를 깨우고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정당한 배움의 장이 간절하다.


우리 같은 이들이 거리를 휩쓸려 다니지 않고,

각자의 품격에 맞는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 나는 다시 한번 '쓸모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세상은 만만치 않고, 몸은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곶감이 다 빠져나간 빈 꼬챙이가 되기 전에, 나는 새로운 기술이라는 양식을 채워 넣으려 한다. 70을 바라보는 나이, 비록 속도는 느릴지언정 나의 배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내가 씨름하는 엑셀의 한 칸은 단순한 표가 아니라, 세상으로 다시 나아가려는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가장 치열한 삶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급했는데 직장 후배가 아무런 조건 없이 엑셀을 메일로 보내줘 너무 고마웠다

선배의 부탁에 귀챦을것인데도 불구하고 싫은 내색 없이 바로 보내준 후배의 따뜻한 마음에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해야 하나!


오늘도 주식 한 종목으로 10만 원을 수익 냈으니

노인이 되어 가는 이 나이에 밥값은 한 것 같은데

후배를 만나 따뜻한 국밥이라도 사주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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