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고무신과 비료 포대

by 자봉

내 유년의 기억은 볏짚 냄새에서 시작된다. 갓 낳은 달걀이 깨질세라 짚단으로 정성스레 싸서 손에 쥐면, 그것은 시장기가 아니라 배움에 대한 허기를 채워줄 유일한 화폐가 되었다. 국민학교 근처 점빵에 도착해 온기가 가시지 않은 달걀을 내밀고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한 개를 손에 쥐던 날, 나는 비로소 세상과 소통할 준비를 마친 아이가 되었다.

내가 자란 곳은 하늘을 봐야만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고, 자동차는커녕 인가조차 드문 깡촌 오지 마을이었다. 여덟 가구가 전부인 마을에서 내 동급생은 없었다. 하굣길은 늘 홀로 넘어야 하는 고행의 길이었다. 우거진 숲길을 지나고, 이름 모를 묘지 곁을 달릴 때면 보이지 않는 산짐승보다 아무도 보이지 않은 고립감이 더 무서웠다. 10리 길(4km)을 오가는 동안 내 유일한 벗은 선배와 후배를 합친 대 여섯명의 아동들이 전부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신작로 옆 마을에 사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왕자표 검정 고무신이 또랑가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나는 비료 포대 양옆을 가위로 잘라 팔을 끼워 넣고 비를 맞으며 걸었다. 포대 속에서 울리는 빗소리는 마치 내 처지를 비웃는 소리 같기도 했고, 때로는 서러운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만년마을의 정호와 흥민이, 삼정마을의 성춘이와 순옥이가 저 멀리서 짝을 지어 하하호호 웃으며 등교할 때, 나는 비료 포대 속에서 그들의 웃음소리를 부러운 눈으로 훔쳐보곤 했다.


내가 태어난 집은 경주 이씨 집안의 대종손가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가 계시는 그 엄격한 유교주의의 울타리는 어린 나에게 안식처가 아닌 거대한 감옥이었다.

우리 집은 대가족으로 늘 가난했다. 식구들 입에 들어갈 보리밥도 모자랐지만, '대종손 집'이라는 명분은 그 가난보다 높았다.

일면식도 없는 일가친척들이 '경주 이씨'라는 성씨 하나만 믿고 불쑥 찾아오면, 어머니와 할머니는 없는 살림에 억수룩하게 고생하며 밥상을 차려내야 했다. 자식들은 굶주림에 배를 골아도 손님상에는 귀하디귀한 계란후라이와 달걀찜이 올라갔다. 유교 사상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그 지독한 '대접'은 정작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할 자식들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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