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6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하루는 전화벨 소리와 함께 저물었다.
퇴근길, 혹은 주말의 한가로운 오후면 손가락은 습관처럼 고향의 번호들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는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 같은 어머니의 가늘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정겨운 누나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고향에서 공직 생활을 하며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던 남동생들과 나누던 시시콜콜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내 삶의 가장 큰 활력소였다.
그때는 몰랐다. 쉴 새 없이 울려대던 그 전화벨 소리가 실은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배경음악이었다는 것을. 시골집 마당의 감나무 아래서 농사일을 멈추고 전화를 받던 누나와 어머님의 거친 숨소리도, 어머니의 끊이지 않던 자식 걱정도 이제는 모두 박제된 기억 속의 소음이 되어버렸다.
하나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났다.
이제 내 휴대폰은 고요하다. 전화를 걸 곳도, 먼저 걸려 올 곳도 마땅치 않은 적막 속에서 나는 비로소 ‘상실’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온몸으로 실감한다.
적막이 찾아온 자리에 불청객처럼 들어앉은 것은 사람에 대한 환멸이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인자한 척 곁을 지키던 작은아버지들은, 어머니가 채 숨을 거두기도 전부터 본색을 드러냈다. 치매와 병환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노모 앞에서 그들이 내뱉은 말은 안부가 아니라 ‘돈’이었다. “돈을 달라, 논을 달라.” 인륜을 저버린 그들의 요구는 죽은 남동생들의 사망보험금에까지 손을 뻗었다.
이 기막힌 광경을 보며 나는 문득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방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독자로 태어나 집안을 건사하셨던 종손이셨다. 어린 내 손을 잡고 잠자리에 드실 때면 할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시곤 했다.
“손주야, 나중에 네가 커서 어른이 되면 네 작은아버지들이 너를 몹시 괴롭히고 힘들게 할까 봐 이 할아비는 벌써 걱정이 되는구나.”
그때는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님과 누나와 남동생들까지 곁을 떠나 내 울타리가 사라지자, 할아버지의 걱정은 마치 저주 섞인 예언처럼 현실이 되어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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