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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Apr 29. 2024

유독, 정이 많았던 큰 고모님

현대는 자녀들도 많이 낳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아 지금 세대들을 보면 안타갑기도 한다.

우리가 성장하던 시기와 부모님 세대에서는 먹고살기가 어렵더라도 대부분의 부모 세대들은 많은 자녀를 낳으면서 " 자기들 복은 각자 가지고 태어난다"라고, 하여 부농이나 빈농이나 아들 딸 구분하지 않고 보통 5남매나 7남매 많게는 자녀를 11명의 자녀들을 낳은 부모님도 많았다.

우리 집도 대가족으로 아버지는 장남이다.   할머님이 5남 2녀를 낳으셔서 고모님도 두 분 계셨다.


      (족두리 쓴 큰 고모님의 결혼식 사진.  할아버지와

       어머니 작은 고모 등 가족들이 보인다)


큰 고모는 아버지 바로 밑에 동생으로 아버지와 두 살 터울인데 고향집 가까운 마을로 결혼을 하여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교 갔다 배가 고프면 큰 고모님 집에 가서 굶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수줍음을 많이 탔던 나는 타인들을 만나면 금방 얼굴이 빨개져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큰 고모집도 우리 집처럼 자녀들이 많아 2남 5녀를 두셨다.

고모집에는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촌누나가 있었고, 엇비슷한 딸들이 나이 적은 터울을 두고 태어나 큰고모집

자녀들과 우리 집 남매들은 학년이 서로 비슷비슷했다.

우리 집은 마을도 보이지 않은 산중턱과 고개를 넘고 울창한 숲과 공동묘지를 지나는 먼 거리였지만 고모집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인근에 제법 마을이 크고 가구수도 많아 마을 사람들이 많았다.

60년대 70년대 산골 오지에서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텔레비전도 없었기에 문화혜택도 받지 않아, 1년에

한 두 차례 군청 문화공보실에서 봉고차에 영화필름을 싣고 와 캄캄한 밤이 되면 초등학교 운동장에 하얀 천으로 벽과 스크린을 만들어 마을사람들과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여 주곤 했다.



많아야 1년에 한두 번인데 학교에서 영화를 보게 되면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누나와 여동생은

초등학교 근처인 큰고모집에서 사촌누나와 동생들과 함께 잠을 자고 다음날 학교로 등교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은 큰고모님과 어머님이 시골5일장에 가셔서 풀방과 생선 등 시장을 봐

10리 떨어진 우리 집에서 시장 짐을 내려놓고 피곤해서 낮잠을 주무시고 있었다.

피곤해서 곤히 잠들어 주무시고 있는 어머님과 고모님을 깨울 수 없어 너무 배가 고파 시장바구니를  뒤져보니 밀가루에 팥을 넣어 만든 풀빵이 있어서 그냥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먹었다.

조금 후 어머님과 큰 고모님이 낮잠을 주무시고 깨시더니 시장 봐온 풀빵을 내가 먹어버려 어머님은 당황

하셨다.   알고 보니 큰 고모가 내 또래인 자식들을 줄려고 시장에서 풀빵을 사 왔던 것이었다.

먹어 버린 풀빵 때문에 어머님한테 꾸지람을 당하는데 큰 고모는 조카가 먹은 풀빵인지라, 전혀 화를 내시거나 꾸지람도 하지 않았다.

 



고모는 친정집 남자 큰 조카이고, 장손인 나를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항상 예뻐하셨다.

읍내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고모는 읍내 재래시장에서 꽃가게를 하셨는데 반찬도 만들어 주시고, 가끔씩

고모집에 놀러 가면 "우리 종손, 장손" 왔다고 칭찬해 주고 예뻐해 주셨던 참. 정이 많은 고모였다.

대부분의 고모들이 조카들을 예뻐하고 사랑해 주지만 우리 큰 고모는 유독 친정 큰 조카인 나를 예뻐해

주셨는데  뇌경색으로 병으로 앓다가 작년에 별세하셨다.

고모님이 두 분이셨는데 나에게 사랑을 듬뿍 담아준 두 고모님 모두 별세하시고 지금은 계시지 않으니

큰 고모가가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특히. 큰고모님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가장 정이 따뜻한 분이셨고,  소탈해서 조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가장 편했다.


수년 전 할머님이 별세하셔서  연금공단에서 지급한 사망 조문금 0백만 원을 수령해 처갓집 근처 사찰해서 평소에 큰 손주인 나를 예뻐해 주셨던 할머님을 극락왕생 하시도록 공단에서 받은 조문금으로 스님을  모시고 1 재부터부터 시작해 49재까지

 해드렸다.


우리 부부가 할머님을 위해서 자식들도 하지 않은 49재를 해드렸더니 할머님의 큰 딸이고,

 나에게는 큰 고모이신 고모님은 "종손은 하늘이 내린다"라고 칭찬을 극찬하셨다.


고모님은 "할머님 49재를 누가 시켜서 하느냐"라고 물어봐 " 그냥 할머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 고마움에

49재를 해 드렸다고 답했다.



그런데  고모님의 막냇동생인 나의 작은 아버지는 " 너희들이 할머니 49재를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것"이라면서 마음 상하게 말씀하셨다.

똑같은 할머님 뱃속에서 낳은 고모와 작은 아버지이지만, 이렇게  고모는 친정집 큰 조카에게 극찬과

칭찬을 해 주지만,  작은 아버지는 칭찬은커녕 비아냥 거리게 말씀을 하시니 여간 서운했다.

49재를 하면서  그 당시 나에게는 거금인 300만 원 이상을 할머님 49재 해 드리는 데 사용했는데

칭찬은커녕  멸시하고 무시하니 여간 서운했다.

그래서 요즈음 들어보면 아들보다 딸들이 더 효도를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요즘 아이들은 형제자매들이 많아야 2명뿐이니 고모나 이모, 삼촌도 없는 아이들이 많을 것인데,

과거에는 먹고살기는 힘들었어도 자녀들을 많이 낳아 고모. 이모. 삼촌 이 많았고,

가족 간에 오고 가는 정이 많았던 우리들 세대의

지난날들이 그립다

 


                   ( 큰 고모님의 산소)

(모 일간 신문에 게제된. 큰 고모님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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