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추억들과 기록들

행정의 최말단 기관에서부터

by 자봉

1. 빗줄기 소리에 깨어나던 긴장의 밤 들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는 소리가 있다.

내게는 여름밤 창가를 때리는 굵은 빗줄기 소리가 그렇다.

퇴직한 지 수년이 흘렀어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살피곤 한다. 35년 공직 생활이 몸에 새겨놓은 일종의 '비상소집' 본능이다.

현직에 있을 때, 비가 오면 우리는 잠을 잊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쏟아지면, 행정복지센터(당시 동사무소) 직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장화를 신고 현장으로 뛰어 나갔다.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은 배수구였다.


낙엽과 쓰레기가 뒤엉켜 빗길을 막고 있는 배수구 바닥을 맨손으로 훑어내고, 꽉 막힌 이물질을 끄집어낼 때마다 흙탕물이 온몸을 적셨다.

빗물받이가 막혀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물길을 손으로 싹 청소해 주고 나서야 비로소 물이 제 길을 찾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쏴아' 하는 소리는 어떤 음악보다도 안도감을 주었다.

수방 대책이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우리는 빗물이 고인 저지대를 찾아 밤새 순찰을 돌았고, 이미 침수된 지하 단칸방에 들어가 양수기를 돌리며 주민들과 함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한기가 느껴져도, 주민들의 가재도구가 물에 잠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


2. 눈꽃보다 시렸던 염화칼슘의 무게

겨울이라고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하얗게 내리는 눈은 밖에서 보기엔 낭만적 일지 몰라도, 언덕배기 주택가가 많은 동네를 책임지는 공직자에게는 치워야 할 숙제이자 사고의 위험이었다.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삽을 들고 언덕길로 향했다.

그 시절엔 지금처럼 세련된 제설 차량이 골목마다 들어오지 못했다.

우리는 염화칼슘 포대를 등에 지고 날랐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 위에 삽으로 염화칼슘을 푹 떠서 길목마다 뿌려줄 때마다, 어깨는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손끝은 시리다 못해 감각이 무뎌졌지만, 행여나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미끄러질까, 출근길 차들이 사고가 날까 싶어 굽이진 골목마다 하얀 가루를 골고루 펼쳤다.

언덕길 주택가 주민들이 대문을 열고 나와 "고생이 많다"며 건네주던 따뜻한 차 한 잔. 그 온기에 얼었던 손과 마음이 녹아내리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참으로 고생스럽고 힘들다 여겼던 그 일들이,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내 공직 인생에서 가장 보람차고 빛나던 순간들이었다.

책상 앞의 행정이 아니라, 발로 뛰며 주민의 삶을 지켜내던 그 현장이 진짜 내 일터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3. 상전벽해(桑田碧海), 달라진 풍경과 남은 마음

요즘 내가 사는 동네를 거닐다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우리가 근무했던 수십 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주거 환경이 좋아졌다.

상습 침수 구역이었던 낡은 주택가에는 세련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재개발과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통해 동네는 몰라보게 깔끔해졌다.

이제는 비가 와도 배수 설비가 잘 갖춰져 있어 예전처럼 맨손으로 오물을 파낼 일이 줄어들었을 것이고, 눈이 오면 자동 제설 장치가 염화칼슘을 대신 뿌려주기도 한다.

근무 환경 역시 우리 세대가 겪었던 열악함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

후배 공직자들이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보면 선배로서 마음이 뿌듯하고 다행스럽다.

하지만 환경이 좋아졌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공직자의 마음'까지 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빗물받이를 손으로 훑어내고 눈길에 염화칼슘을 뿌렸던 것은 단순히 업무를 처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이웃의 안전을 살피는 '사랑'이었고, 공직자로서의 '사명감'이었다.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린 풍경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는 누군가의 땀방울은 여전히 이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다.


4. 고향의 숨결과 70 평생의 회고

나의 고향 정남진은 굽이진 길목들에도 조상님들의 성실한 숨결이 서려 있다. 종손으로서, 그리고 35년 공직자로서 내가 걸어온 길은 어쩌면 그 숨결을 이어받아 내 시대의 책임을 다하려 했던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아흔여섯의 나의 아버지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사람은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깨끗하게 닦아야 한다"라고. 그 가르침에 따라 나는 현직에 있을 때나 퇴직 후 행정사로 일하는 지금이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한다.

70 평생 매일 걷는 8,000보의 걸음마다,

나는 과거의 고생스러웠던 기억들을 보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쓰고 있다.

도서관에 앉아 글을 쓰는 지금, 창밖으로 비가 내린다. 예전처럼 장화를 신고 달려 나갈 일은 없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그 빗물 고인 지하 단칸방과 눈 덮인 언덕길을 향한다.

그때의 고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평온함이 더 값지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5. 후배들에게 전하는 응원의 문장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방 대책 현장에서, 혹은 민원인의 거친 항의 소리 속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후배 공직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들이 흘리는 땀방울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지금 당장은 몸이 고되고 알아주는 이 없어 쓸쓸할지 모르나, 세월이 흘러 뒤돌아보면 그 헌신이야말로 당신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훈장이 될 것이라고.

세상은 좋아졌고 환경은 변했지만,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만큼은 변치 말기를 바란다. 승진의 결과보다, 내가 오늘 누군가의 앞길에 놓인 돌멩이 하나를 치워주었는지, 막힌 빗길을 터주었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진정한 공직자의 길임을 나는 칠순의 나이에 이 글을 쓰며 다시 한번 새긴다.

나의 겨울은 치열했고, 나의 여름은 뜨거웠다.

그래서 다가올 나의 봄은 더욱 눈부실 것이다. 오늘 하루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모든 이들에게, "정말 고생 많으셨다"는 위로와 함께 이 글을 바친다. 당신의 노고 덕분에 누군가의 오늘이 평온했음을 잊지 말기를 당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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