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

스위스의 탄생과 지속

by 성주영


설원으로 뒤덮인 산맥


그 산맥에서 800만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그들은 질서 정연하면서도 자유를 추구한다.


오늘날 지구의 금고 역할을 하는 이곳


작고도 강한 고슴도치와도 같은 이곳


다양성과 평등이 공존하며


외세의 침략 없이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는 이곳


신을 명분 삼은 장기간의 충돌 이후 종이와 펜 하나로 거대한 땅 덩어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곳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줄까….



해설: 스위스는 인구 약 800만여 명을 가진 유럽의 중소강국입니다. 아시다시피 스위스는 국제 금융 중심지입니다. 이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영세 중립국으로서의 정치적 안정과 높은 신뢰도, 오랜 기간 은행 비밀주위를 유지해 자산가들의 환심을 샀고(돈의 출처가 어디든 간에 비밀로 해주기 때문) 금융 분야에서의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인력, 낮은 법인세율과 같은 기업에게 유리한 경제적 여건, 투명한 규제로부터 비롯한 금융 시장의 재무 건전성 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금융업과 더불어 관광업(알프스 산맥과 스키 등) 역시 스위스 경제의 핵심입니다. 게다가 캐나다•호주처럼 다양성과 평등이 확고히 자리잡은 곳이기에 외국인들에게 있어 이민가서 정착하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또한 스위스의 특이점은 외세가 침공하기 어렵다는 악명 높은 지리입니다. 특히나 스위스는 전체 국토 면적 중 70%가 산악 지대며 특히나 알프스 산맥의 중심에 위치한 나라라서 산맥 지형 중 60%는 알프스 산맥이 차지합니다. 이렇듯 외세가 쳐들어오기 힘들었던 지정학적인 위치는 스위스가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한 이래로 영세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오죽하면 나치도 스위스 침공 계획을 세웠다가 지리와 날씨 때문에 포기했을 정도…) 그리고 전통적으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주변의 열강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어 항상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어 시설, 방공망과 방공호 등이 잘 구비되어 있고, 내륙 국가라 해군은 없지만 중부 유럽 국가(오스트리아, 체코 등)처럼 육군과 공군 전력이 막강한 군사 강국이며 군수산업 역시 잘 구축되어 있습니다.


스위스의 기원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30년 전쟁(1618-1648)입니다. 30년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슈말칼덴 전쟁(1546-1547/개신교 vs 로마 카톨릭)의 결과로 1555년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루터파 개신교를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인정한다는 내용)를 위반해 일어난 전쟁입니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페르디난트 2세의 전임 황제였던 마티아스가 페르디난트 2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주었고 이 왕위에 앉은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에서 개신교 집회를 못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의 대리인들이 집회 금지령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보헤미아 내 개신교 세력과 충돌했고 이에 화가 난 개신교 세력은 페르디난트 2세의 대리인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이를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라고 부름/보헤미아=현재 체코) 이에 화가 난 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 세력은 반발 결국 페르디난트 2세로 대표되는 카톨릭 세력과 전쟁을 하게 되는 이게 바로 30년 전쟁인 것입니다.


전쟁 초기에는 당연히 개신교 세력이 열세였습니다. 하지만 주변 개신교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 세력을 원조하러 왔습니다. 명분은 다양했습니다. 첫 타자는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당시 국왕은 크리스티안 4세로 명분은 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 세력을 도와주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종교 내전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혼란한 틈을 타 신성로마제국의 북부 영토를 장악해 발트해의 제해권을 쥐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카톨릭 세력에 의해 패배하고 결국 뤼베크 평화 조약을 체결 전선에서 이탈합니다. 이때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이 평화 조약에서 신성로마제국이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에 전쟁 배상금을 물리지도 않았고, 포로 즉시 교환 등의 조건을 내걸며 선처해 주자 이에 감복한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은 신성로마제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전쟁 내도록 중립을 지키거나 혹은 카톨릭 세력 측에 참전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타자는 스웨덴 제국이었습니다. 당시 국왕은 독실한 루터파 개신교 신자였고 발트해를 차지해 패권을 강화하고 싶었던 북방의 사자라고 불리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그 역시 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 세력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했습니다. 그 결과 연전연승하며 당시에 승리했던 뤼첸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싸우다가 전사합니다. 하지만 개신교 세력의 구심점이자 전략가•명장 역할을 했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죽자 개신교 동맹군은 내우외환에 빠졌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카톨릭 세력에 패배하면서 사기가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이후 프라하 조약으로 스웨덴 제국 역시 전선에서 이탈합니다.


세 번째 마지막 타자는 프랑스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카톨릭 국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프랑스가 개신교 세력을 구제하려고 참전했을까요? 당시 프랑스는 에스파냐(합스부르크 가문 소속) 신성로마제국(합스부르크 가문 소속)에 의해 지정학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양쪽에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동쪽의 신성로마제국이 페르디난트 2세와 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거대한 통일 제국이 되는 것을 막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의 추기경 리슐리외는 이를 위해 첩보전•외교전&전비 마련을 동시에 진행한(특히나 스웨덴•네덜란드 등을 동맹으로 포섭하고 스웨덴에게는 비밀리에 군자금까지 조달합니다.) 후 30년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프랑스의 참전으로 신성로마제국 내 카톨릭 동맹은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이하고 결국 장기화되는 전쟁을 버티지 못 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와 카톨릭 세력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합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신성로마제국 내 칼뱅파와 루터파를 전부 인정하고 네덜란드를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시키고(당시 네덜란드는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때 에스파냐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네덜란드 독립 전쟁=80년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은 영토를 확보해 발트해의 패권을 확립했으며, 신성로마제국 내 제후국들에게 주권을 보장하며 300여 개의 영방으로 쪼개져 신성로마제국의 분열은 더 심화되었습니다. 이때 스위스 역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며 독립국이자 영세 중립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여담으로 30년 전쟁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카톨릭 국가임에도 30년 전쟁 당시 신성로마제국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 의회 즉 세임에서 30년 전쟁에 가담하지 않는 것으로 가결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북부에서 스웨덴과 전쟁 중이었고(이를 제4차 스웨덴-폴란드 전쟁이라고 부르며 1626년부터 1629년까지 진행됨. 스웨덴이 승리를 거둠.), 옆동네의 루스 차르국(현재 러시아)도 잠재적 적국이었으며, 남쪽에서는 오스만 제국과 국경 충돌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이 과도한 군사원정으로 만성적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왕실과 귀족이 부담할 세금•병력 차출 등이 합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30년 전쟁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신성로마제국을 도와 가담했더라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주력 기병인 윙드 후사르가 랜스 돌격(3-5m되는 속이 빈 장창을 이용해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것) 또는 카라콜 전술(말을 탄 기병이 가벼운 휠락 머스킷을 들고 적진 바로 앞에서 총을 차례로 난사하며 본진으로 돌아가는 것)을 시전했더라면 전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스위스 하면 역시 칼뱅파 개신교가 유명합니다. 칼뱅이 스위스에 근거지를 두며 교세를 확장했기 때문이죠. 한때 스위스 시계가 한창 열풍이었던 적이 있습니다.(지금도 그런 것 같습니다만 예전에 비하면 좀 덜한 편이죠.) 그 이유가 신기합니다. 프랑스의 앙리 4세 국왕은 개신교 출신이었으나 자국 내 카톨릭 세력의 정치적 반발을 잠재우고 이들러부터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대신 낭트 칙령을 발표합니다. 즉 이 선언을 통해 프랑스 내 개신교 세력 즉 위그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죠. 하지만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이 낭트 칙령을 퐁텐블로 칙령으로 폐지시킵니다. 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1. 종교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절대 왕권 강화


2. 카톨릭을 국교로 유지해 교황청의 지원을 받기 위함


3. 위그노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때때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의 세력을 꺾어버리기 위함. 즉 1번과 연관 있음.


결국 그 결과 위그노들이 박해와 탄압을 피해 인접국인스위스로 대거 이주했고 그러한 위그노들 중 상다수가 기술자와 상공업자들이었고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시계공이었기에 스위스의 시계 산업이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었습니다. 뻐꾸기시계가 스위스의 상징물이 된 것도 이 때문인 것이죠. 프랑스는 이후 급격한 산업 침체기에 빠집니다. 웬만한 기술자들과 상공업자들이 스위스나 해외로 망명해 버렸으니까요. 지금으로 따지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후 푸틴이 부분 징집령을 통해 30만 명을 징집하자 고학벌자들이 러시아를 떠난 두뇌 유출 현상과 똑같은 것이죠.


스위스는 이외에도 제네바 협약(Geneva Conventions)으로도 유명합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수차례의 회담으로 총 4개의 협약과 3개의 의정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에서의 인도적 대우에 관한 기준을 정립한 국제 협약입니다.


제1 협약: 육전에서의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협약(1864년)


제2 협약: 해상에서의 군대의 부상자, 병자 및 조난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협약(1906년)


제3 협약: 포로의 대우에 관한 협약(1929년)


제4 협약: 전시에서의 민간인의 보호에 관한 협약(1949년)


제1 의정서: 국제적 무력 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정서(1977년)


제2 의정서: 비국제적 무력 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정서(1977년)


제3 의정서: 기존의 적십자 및 적신월 외에 추가적인 식별표장인 적수정의 도입에 관한 의정서(2005년)


또한 최근에는 미국과 중국 양국이 관세 협상을 위해 1차 고위급 회담을 스위스 제네바에서 가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양국은 제네바 합의를 도출해 미국은 중국에데 대해 기존에 펜타닐에 부과하던 20%의 관세를 유지한 채 145%의 관세율에서 135%p를 줄인 10%의 관세만 남기기기로 했고 중국 역시 이에 대해 10%의 상호 관세만 부과하기로 했습니다.(여담으로 추후 런던에서 개최된 2차 고위급 회담에서는 제네바 합의 이행을 위한 기본틀(프레임워크)을 마련했으며 이 합의에는 중국의 6개월 간 조건부적 대미 희토류 수출 규제 완화와 미국의 대중 첨단기술 예를 들면 반도체 등의 수출 제품 통제 완화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현재 이러한 스위스 역시 지정학적 변화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역시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그 원인이죠. 이 전쟁 발발 후 러시아의 서진 우려가 커지면서 스위스 역시 이례적으로 전쟁 초기 장기간 유지해 온 영세 중립국 지위에서 벗어나 대러 경제 제재에 동참 SWIFT 결제망에서 러시아를 배제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SWIFT 결제망에서 배제되면 러시아 은행들이 국제 결제망 이용에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러시아 은행의 대금 결제가 지연되거나 어려워지고 이로 인해 교역 활동에 차질이 발생합니다. 또한 러시아 국내 기업들의 수출대금 결제 지연, 금융 거래의 어려움 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경제계와 금융계에서는 ‘SWIFT 결제망 배제가 핵폭탄급 제재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는 전쟁 이후 지금까지 자체 결재망 구축에 나서고 있으며 자국과 우호적인 국가들과의 결제망을 구축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정 부분 어려움을 해소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갈 길이 먼 것도 현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2023년에는 스위스의 영세 중립국 지위를 위협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일단 스위스는 위에서 말했듯 군수산업 발달이 잘 되어 있으며 국제법으로도 영세 중립국 지위를 보장받았기에 타국의 전쟁과 철저히 거리를 둡니다.(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런 스위스가 엎서 언급한 SWIFT 결제망 배제에 동참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죠.) 이 원칙에 근거해 스위스는 분쟁 지역에 자국산 무기·탄약을 수출하지 않고, 이미 수출된 무기도 다른 나라를 거쳐 분쟁지역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통제합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은 대공방어망·전차 등에 사용되는 스위스산 탄약이나 무기, 부품 등을 쌓아놓고도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도 스페인과 덴마크는 '아스파이드' 대공방어망, '피라냐' 보병전투용 장갑차 등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려다 스위스의 반대로 뜻을 접었습니다. 두 무기체계모두 스위스산 부품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이유로 독일은 수십 년 간 비축해 온 스위스산 게파르트 자주대공포 탄약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려 했으나 이 역시 스위스의 반대에 막혔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포탄·로켓탄 소비량은 서방 정보당국의 기존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으며 서방 국가들의 생산량도 우크라이나의 소비량을 따라잡기가 어려웠습니다.(이건 지금도 마찬가지)


그래서 스위스산 무기 수출 허용이 절실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스위스는 자국 헌법에 명시된 중립국 지위를 포기할 수 없다며 반대를 했지만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주변국의 요구와 국내 여론의 압박도 무시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일례로 2023년 2월 5일 스위스 현지 여론조사기관 소모토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로의 무기 재수출을 지지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전체 응답자 중 55%가 찬성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당시 나토 사무총장 옌스 스톨텐베르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인지 아닌지를 따질 게 아니다. 자주권을 존중할 것인지, 법치주의를 수호할 것인지, 유엔 헌장을 사수할 것인지의 문제다. “라며 스위스를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산 무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독일이 스위스 방산업체와 계약 중단까지 거론하고 나섰습니다. 상황이 이렇자 전체 국내총생산(GDP)에서 방위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이고, 전 세계 14위 무기 수출국인 스위스의 의회에서도 자국의 방위산업 보호와 국내 여론을 의식해 무기 재수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현재까지도 별 다른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논의 중이거나 아님 논의되다가 흐지부지된 듯합니다.)


이렇듯 현재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과 안보적 위기를 맞닥뜨린 스위스 기존 영세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벗어던지고 대러 경제 제재에 적극 동참한 만큼 향후 유럽의 안보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있어서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이며 어떤 역할을 맡을지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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