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산전수전
제목: 북방의 사자
북방의 사자를 국왕으로 둔 시절, 이곳은 전례 없는 발전을 목도했다.
하지만 사자의 욕심 때문이었을까? 외부의 변화 때문이었을까?
한때 북방을 호령하던 이곳은 옆동네 이웃들에 의해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그곳을 더욱 단단히 만들었다.
그 결과 다양성과 복지를 완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가구와 자동차의 본고장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급작스럽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곳
앞으로 어떻게 이를 헤쳐나갈지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숨 죽이며 지켜봐야 할 듯하다.
해설: 위 작품은 스웨덴과 관련한 작품입니다. 먼저 스웨덴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칼마르 연맹에 대해서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칼마르 연맹은 현재 북유럽 3개국(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연맹입니다. 오늘날의 북유럽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때는 14세기 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내우외환(한자 동맹과의 경제적 이권 다툼, 귀족들 간의 정치적 내분 등)을 겪고있던 시절 덴마크에서는 마르그레테 1세가 이로한 혼란기 와중에도 왕권을 강화 중이었고, 노르웨이의 경우 후계자 문제로 정치적 내분이 심화되어 국력이 약화된 상황이었으며 스웨덴의 경우 귀족들의 정치적 분열과 한자동맹(뤼베크, 함부르크 등의 거점 도시들을 중심으로 북해•발트해 무역을 주도한 독일 상인 조합이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때 지중해 장거리 무역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가진 상인 조합이었다.)을 통한 독일 상인의 영향력 확대를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자 동맹은 발트해•북해 무역(주로 광물, 목재, 모피, 곡물 등을 사고 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스웨덴의 귀족들과 상인들은 자국 내 팔룬 구리 광산에서 나는 구리를 한자동맹과 교역하며 수익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덴마크는 이러한 한자동맹의 영향력을 줄이고 스웨덴과 한자동맹 간의 무역 활동에서의 이권을 독점하려 했고 이를 위해 통제를 강화•무역과 관세 체계를 자국 중심으로 개편했습니다. 이에 더해 덴마크는 스웨덴 내 자원(광물, 목재 등)을 수탈했고, 스웨덴 귀족의 자치권을 침해하며 요새•영지 등을 몰수•접수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스웨덴의 귀족과 상인 그리고 한자동맹은 덴마크의 이런 조치로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든다고 판단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던 중 스웨덴의 독립을 초래한 결정적 사건이 발발합니다. 1520년에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당시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 귀족 약 80여 명을 학살한 사건) 이로 인해 스웨덴의 민심은 완전히 돌아섰고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바사가 독립군을 이끌고 봉기(스웨덴 독립 전쟁/1521-1523) 여기에 한자동맹 특히 뤼베크라는 도시가 군자금과 무기 함선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줍니다.(덴마크의 패권을 견제하고 스웨덴과의 무역 정상화를 위해서이다.) 결국 스웨덴은 독립하고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스웨덴의 초대 왕으로 등극하자 그는 한자동맹에 경제적 특권을 대거 부여합니다.(세금 감면, 관세 혜택 등) 스웨덴이 떨어져 나간 후 칼마르 연맹은 사실상 해체 이후 스웨덴은 나중에 스웨덴 제국으로 성장합니다. 스웨덴의 성장을 이끈 국왕이 바로 구스타브 2세 아돌프였습니다.
북방의 사자란 제목 역시 스웨덴 제국을 최고 전성기로 이끌었던 이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별명입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군사적 업적으로 유명합니다. 일단 스웨덴 제국 군대의 편제와 군제 개편을 시도했습니다. 우선 당시 스웨덴 제국의 인구적 한계를 극복하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징병제를 도입해 상비군을 유지하고 여단 편제를 도입했으며 제국의 신민들을 사실상 예비군으로 편제해 전시에 신속하게 동원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포병 부대를 독립적으로 운영했고 이 포병 부대와 기병•보병 부대 간의 제병 협동을 중시했습니다. 또한 기존의 기병 중심 전투 방식에서 벗어나 대규모 보병 부대를 조직, 기동성과 화력을 강화해 전투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군대 편제를 단순화하고 체계적인 훈련 체계를 도입해 군대의 전투력을 향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동성을 강화할 수 있는 전술 개발에 몰두했으며 총기의 경량화를 통해 휠락 머스킷을 개발 보병•기병의 기동성과 전투 효율성을 향상했습니다. 또한 대포의 기동성과 경량화를 위해 연대포를 도입하고, 대포의 포신을 늘리고 포격 훈련을 강화시키며, 대포의 위치를 유동적으로 조정, 대포를 전열에 배치해 화력 집중을 시도하여 대포의 정확도 또한 높였습니다. 게다가 뛰어난 리더십으로 솔선수범하여 전투에 임하며 부하 장병들의 사기를 높였습니다.
이런 그가 활약한 전쟁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전쟁이 제4차 스웨덴-폴란드 전쟁, 30년 전쟁이었습니다.
1. 제4차 스웨덴-핀란드 전쟁(1626-1629):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1626년 엘빙에 상륙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봉신국 프로이센의 해안 요새 장악•폴란드군 기습에 대비해 방어망 구축했으며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그문트 3세가 윙드 후사르(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주력 기병)를 이끌고 스웨덴군에 의해 점령당한 메후바 구원을 시도하나 실패합니다. 이후 1628년 그루돈츠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프로이센 중부 내륙을 점령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역습해 일부 지역을 수복하기는 하나 전략적 성과는 미미했습니다. 같은 해 혼슈타인 전투에서는 스웨덴군이 방어전에 돌입했고 이후 양국이 교착 상태를 유지하며 결국 양국 군대가 철수합니다. 1629년 트첸스크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스웨덴 제국에 큰 손실을 안겨주며 대승을 거두나 같은 해 구스토진 전투에서는 소규모 교전을 벌이지만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이후 전선에 큰 변화가 없자 알트마르크 휴전 조약이 체결되고 스웨덴은 결국 프로이센 항구에 대한 점령을 유지하며 폴란드의 리보아니아(리투아니아)에 대한 영유권 포기, 발트해에서의 무역•관세권을 차지하며 스웨덴은 결국 발트해 재해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합니다.
2. 30년 전쟁(1618-1648):
30년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슈말칼덴 전쟁(1546-1547/개신교 vs 로마 카톨릭)의 결과로 1555년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루터파 개신교를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인정한다는 내용)를 위반해 일어난 전쟁입니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페르디난트 2세의 전임 황제였던 마티아스가 페르디난트 2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주었고 이 왕위에 앉은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에서 개신교 집회를 못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의 대리인들이 집회 금지령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보헤미아 내 개신교 세력과 충돌했고 이에 화가 난 개신교 세력은 페르디난트 2세의 대리인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이를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라고 부름/보헤미아=현재 체코) 이에 화가 난 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 세력은 반발 결국 페르디난트 2세로 대표되는 카톨릭 세력과 전쟁을 하게 되는 이게 바로 30년 전쟁인 것입니다.
첫 번째는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이었으나 신성로마제국에게 패배한 후 전선에서 이탈합니다. 두 번째 타자는 스웨덴 제국이었습니다. 당시 국왕은 독실한 루터파 개신교 신자였고 발트해를 차지해 패권을 강화하고 싶었던 북방의 사자라고 불리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그 역시 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 세력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했습니다. 그 결과 연전연승하며 당시에 승리했던 뤼첸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싸우다가 전사합니다. 하지만 개신교 세력의 구심점이자 전략가•명장 역할을 했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죽자 개신교 동맹군은 내우외환에 빠졌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카톨릭 세력에 패배하면서 사기가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이후 프라하 조약으로 스웨덴 제국 역시 전선에서 이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프랑스의 참전으로 전세가 개신교 동맹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이후 결국 신성로마제국이 패배하며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됩니다.
비록 전사했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위와 같은 활약 덕에 30년 전쟁 후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스웨덴은 영토를 추가로 확보해 발트해의 패권을 확립합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전사 후 칼 10세 구스타브(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뒤를 이어 30년 전쟁 말기에 스웨덴군 총사령관 역임)가 제2차 북방 전쟁(1655-1660)에서 대홍수(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겪었던 정치적•외교적 내우외환)로 정신없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위를 노리고 침공(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겪었던 대홍수 중 일부)하자 반스웨덴 국가라 할 수 있는 루스 차르국,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 독일의 여러 제후국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편에 서서 싸웁니다그 결과 스웨덴은 폴란드 왕위 확보에는 실패하나 리보니아에 대한 영유권은 들고갑니다. 또한 칼 11세 구스타브 시절에는 스코네 전쟁(1674-1679)에서 지나친 원정과 대외팽창으로 경제적 위기에 빠진 스웨덴 제국과 루이 14세의 프랑스 왕국이 동맹을 맺고 독일 북부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반스웨덴 국가였던 네덜란드와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은 이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스코네는 원래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의 영토였지만 제2차 북방 전쟁에서 스웨덴에게 뺏겼고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은 이런 스코네를 스코네 전쟁을 통해 탈환할 목적이었습니다만 1678년 스웨덴과 네덜란드 간의 메이헌 조약으로 네덜란드가 이탈하고 1679년 프랑스 왕국의 중재로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과 스웨덴 간의 퐁텐블로 조약이 체결된 뒤 휴전합니다. 그 결과 스코네에 대한 스웨덴의 지배권은 국제적으로 재차 인정되어 사실상 스웨덴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이렇듯 지속적으로 발트해와 독일 북부에 영향력을 투사하던 스웨덴 제국은 국가 체급에 맞지 않는 무리한 원정과 대외팽창으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여담으로 스코네 전쟁 후 칼 11세 구스타브는 내치에 힘써 경제 회복과 군제 개편&군대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대북방 전쟁(1700-1721)이었습니다. 스웨덴 제국의 칼 12세 구스타브가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대제를 상대로 발트해의 제해권 확보를 위해 격돌합니다. 나르바 전투에서 스웨덴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격파하고 이후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도 패퇴시켜 초기에 선전합니다. 폴타바 전투에서 우크라이나 코자크 세력인 이반 마제파와 함께 루스 차르국에 대항하지만 실패합니다.(우크라이나의 코자크 세력은 이미 러시아 제국에 종속된지라 스웨덴을 등에 업고 독립하고자 싸움. 하지만 패배함으로써 오히려 종속이 강화되는 계기가 됨.) 이후 칼 12세 구스타브는 오스만 제국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흐메트 3세와 동맹을 체결하고 오스만 제국의 원조로 프루트강 전투에서 승리하나 오스만 제국이 루스 차르국과 단독 강화를 맺어 동맹에서 이탈한 후 프로이센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루스 차르국,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왕국 등의 반격으로 스웨덴 제국은 결국 패배합니다. 그 결과 스웨덴 제국은 발트해에 대한 제해권을 상실했고 루스 차르국이 발트해에 대한 제해권을 들고 갑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나폴레옹은 1806년부터 1807년까지 독일-폴란드 원정을 단행합니다. 이때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한테 대패하고 틸지트 조약을 체결해 명목상 프랑스와 동맹국이 됩니다. 이 시기 스웨덴은 발트해에 대한 제해권을 들고 오기 위해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지만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프랑스와 명목상의 동맹을 체결한 알렉산드르 1세 치하 러시아 제국이 스웨덴 제국으로부터 핀란드를 빼앗아 옵니다.(핀란드 전쟁) 나폴레옹은 틸지트 조약에 근거해 이를 묵인합니다. 하지만 대륙 봉쇄령(베를린 칙령)을 어긴(1810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를 응징하고자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 원정을 단행해 보로디노 전투를 함으로써 러시아 제국과 사이가 안 좋아지고 러시아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지만 스웨덴은 여전히 러시아에 의해 빼앗겼던 핀란드를 돌려받지 못합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서서히 몰락하자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왕국은 덴마크 왕국과 노르웨이 왕국 둘로 쪼개지고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던 스웨덴이 핀란드 대신 노르웨이를 들고 갑니다. 이리하여 1814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이 탄생합니다. 하지만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은 1905년에 해체되고, 양국은 각자의 길을 걷습니다.
이후 스웨덴은 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중립국을 선언 무난하게 이 세계 대전을 넘어가고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중립국을 선언합니다만 사실상 추축국에 가담한 행보를 보입니다. 먼저, 철광석과 석유 등 전쟁 물자를 나치에게 제공해 주었으며 특히나 나치가 노르웨이 침공을 감행할 때(베저위붕 작전) 나치에게 여러 가지 지리•군사 정보를 알려주고 자국 내 철도 이용을 허용해 나치가 노르웨이 전선으로 병력을 옮기는 것 역시 묵인하는 등 매우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물론 스웨덴은 연합군과도 군사 정보를 공유, 유대인•덴마크•노르웨이 난민을 수용하고, 연합군 정보부와 협력해 비밀리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등의 조치도 취했습니다만 나치에게 협조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당시에도 이런 이중적 행보 때문에 연합군과 추축국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게 2차 세계 대전을 무난히 넘긴 스웨덴은 냉전 시기 소련과 우호적 중립국 정도로 지내며 별 탈 없이 냉전을 지냅니다. 하지만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반도 강제 합병으로 위기감을 느낀 스웨덴은 꾸준히 국방비를 증액했고, 결국 이러한 스웨덴의 오래된 중립 정책 역시 2022년 2월 24일에 발발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2024년 나토 가입을 함으로써 깨집니다.(튀르키예가 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가로막는데 그 이유가 바로 튀르키예가 테러 단체라고 지정한 PKK 즉 쿠르드 노동자당을 스웨덴이 지지•지원한다는 의혹 때문이었고, 또한 비슷한 시기 러시아와의 외교적 관계 악화를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러시아에게 튀르키예가 쉽게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튀르키예가 무조건 서방만 따라가지 않으며 러시아와의 관계도 고려한다는 걸 보요주기 위함이었죠. 그래서 스웨덴의 나토 가입이 핀란드보다 늦어진 것입니다.)
스웨덴은 2025년 7.345점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 4위에 해당되었습니다. 이는 스웨덴의 높은 수준의 복지 덕분이고 그러한 복지가 가능한 이유는 투명한 정치 체제와 그로 인한 국민과 정치인들 간의 탄탄한 신뢰, 다수의 젊은 신인 정치인의 활동 그리고 스웨덴의 탄탄한 산업적 기반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웨덴은 알다시피 세계적인 가구 기업인 이케아(IKEA)와 지동차 회사 볼보(VOLVO)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볼보(VOLVO)는 스웨덴의 예테보리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1927년에 창립되었습니다. 스웨덴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15-20%에 해당하는 시장 점유율을 점하고 있으며 볼보 트럭(1928년 트럭 사업 부문이 분리되자마자 창립/볼보 계열의 회사)이 유럽 내 전기 트럭 시장에서는 56%에 달하는 시장 점유율을 미국에서는 같은 분야의 시장 내에서 44%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남미, 한국, 모로코, 말레이시아 등지로 전기 트럭 수출을 본격화하며 시작 확대를 꾀하고 있습니다. 공사장에서 자주 보이는 SCANIA 역시 트럭 제조로 유명합니다. 원래는 스웨덴의 재벌 가문인 발렌베리 가문이 이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폭스바겐이 지분 비율을 늘리며 현재 70%가 넘는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설립국과 소재지는 스웨덴입니다. 한국 수입 상용차 시장에서 볼보 트럭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유럽 시장에서는 18.8%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고(2025년 기준), 2019년에는 브라질 시장에서 볼보 트럭(28.1%), 다임러트럭(27.3%)에 이어 스카니아(24.5%)가 3위를 기록했습니다. 이케아(IKEA)의 경우 스웨덴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시작해 1943년 스웨덴에 본사를 두고 창립됐습니다. 이케아(IKEA)는 전 세계 가구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 30개국에 370개 매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국 내 가구 업계에서도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3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진출하는 국가마다 가구 시장의 5-10%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게 가능한 이유는 합리적인 가격, 실용성, 트렌디한 디자인 이 세 가지 요소가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스웨덴은 탄탄한 경제를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복지를 유지하며 특유의 개방성과 다양성으로 이민자들이 와서 다수 정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 이로 인해 2022년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스웨덴민주당이 약진 집권 연합에 포함되었으며 심화되는 정치적 갈등과 치안 불안이 현재 스웨덴이 맞닥뜨린 내부적 문제입니다. 이에 더해 앞서 언급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발발로 대외적인 지정학적 위기와 맞물리면서 내우외환을 겪고 있는 현재 스웨덴의 향후가 어떻게 될지 더욱 주목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