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atros Jan 20. 2022

팔리누로스의 잠과 죽음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잠은 상실과 죽음으로 향하는 통로

그 동안 개인적인 업무로 바빠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이 죄송하여, 글 하나를 준비해보았습니다.


제가 요즘 ‘잠’이 부족해서인지, 잠에 대한 글을 써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의 주제 역시 잠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잠은 보통 ‘죽음’이나 ‘상실’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잠의 신인 ‘히프노스’가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와 쌍둥이 형제로 여겨지는 것은,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이 죽은 사람처럼 체온이 떨어지고, 호흡수가 감소하며, 움직임이 거의 없는 것에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또한 잠에 빠진 사람들은 주위 환경의 변화에 무뎌지고, 빠른 대응을 할 수 없게 되기에 무방비하고 무력한 상태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히프노스와 타나토스 형제

현대에는 잠이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소중한 상태로 생각되지만, 지금보다 훨씬 불안정하고 위험이 가득했던 고대 시대에는 잠이 가지는 무방비함이 미덕으로 여겨지기 힘들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그에 따라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잠에 빠진 존재들은 다들 위험하거나 슬픈 상황에 처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앞서 보여드렸던 얘기들 중에서 살펴보자면, 우선 [미로의 어원]에 관련된 이야기에 등장했던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는 잠이 든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인 테세우스에게 버려졌습니다(그냥 버려진 정도가 아니라 낙소스섬에 혼자 덩그라니 남겨졌죠). 그리고,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나오는 폴리페모스는 술에 취해 잠에 빠진 후 자신의 눈을 잃는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에로스의 연인인 프시케도 신들의 화장품을 탐내다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 그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뻔 했습니다.

낙소스 섬에 남겨진 아리아드네


그리스-로마 신화가 아니라도,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등장하는 잠 역시 죽음과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거나 일종의 형벌과도 같은 의미였습니다. 왕자가 키스할 때까지 전혀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 역시 극도로 무방비함을 보여주는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잠이 상실과 죽음으로 연결되는 예시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말씀 드릴 ‘팔리누로스의 이야기’입니다.



팔리누로스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필로그이자 외전?)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인 ‘아이네이스(Aeneis)’ 속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아버지인 안키세스를 업고 트로이에서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


아이네이스는 트로이 측의 영웅이었던 ‘아이네이아스’의 일대기를 다룬 서사시로, 로마 시대의 시인은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가 패배하고 멸망하게 되자, 트로이의 왕족인 아이네이아스(아버지가 왕족인 안키세스이며, 어머니는 아프로디테)가 고향을 탈출하여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을 헤매이다가 결국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하여 로마의 전신인 ‘라비니움’을 세우기까지의 일을 서술합니다.

아이네이아스의 항해경로를 표시한 지도. 출처-위키피디아.


아이네이아스는 그리스 측 영웅들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그리스 신화와 오디세이아 등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아이네이스 자체는 굉장히 재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고 느끼길 수 있습니다. 유명 영화나 드라마의 스핀 오프 시리즈 같은 느낌을 준달까요?


특히 오디세우스가 만났던 폴리페모스라던가, 스퀼라와 카리브디스 같은 괴물들을 만나게 되는 내용도 흥미롭고(특히 폴리페모스는 ‘전에 왔던 그 놈이냐’며 화를 내는 모습도 나옵니다), 헥토르의 부인이었으나 그리스 측으로 전리품처럼 끌려갔던 안드로마케의 후일담도 알게됩니다.


물론 아이네이스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카르타고에 도착하여 그 곳의 여왕인 디도와 사랑에 빠졌다가 결국 그녀를 버리고 떠나게 되자, 디도가 아이네이아스와 그가 세울 나라(로마)를 저주하며 자살하는 내용일 것입니다(약간 아리랑 가사 같기도 한…).


그림. 디도 여왕의 죽음(1631년 작).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아이네이아스 일행의 선단을 바라보며 장작더미 위에 올라 자결 후 자신의 시신을 불태우게 합니다.


로마의 최대 위기 중 하나였던 포에니 전쟁(로마 VS. 카르타고)의 기록을 알고 있는 베르길리우스였기에 이 부분을 아주 극적으로 묘사한 것 같습니다.


그럼 이런 기나긴 여정의 도중, 오늘의 주인공인 팔리누로스는 어디에서 등장하는 것인지 궁금하실텐데, 아이네이아스가 디도 여왕을 버리고 카르타고를 떠나 이탈리아 반도를 향하는 부분에서 팔리누로스가 언급됩니다.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카르타고를 떠나 항해를 하던 도중, 시실리 섬 근처에서 엄청난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배가 난파될까 걱정하고 있을 때, 바다의 신인 넵튠(그리스 신화 속 포세이돈의 로마 이름)이 일행 중 한 명을 희생시키면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무사히 바다를 건너게 해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같이 이겨낸 동료 혹은 부하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너무 슬펐지만,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아이네이아스는 결국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의 충실한 키잡이인 팔리누로스를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팔리누로스가 선택되자, 바다의 신은 잠의 신인 솜누스(Somnus, 히프노스의 로마식 이름)에게 부탁하여 팔리누로스를 잠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가 잠에 빠지자 잠의 신은 그를 밀쳐 바다로 빠뜨렸습니다. 팔리누로스는 키를 잡은 채로 바다에 빠져 동료들을 애타게 불렀지만 폭풍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고, 팔리누로스는 결국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얼마나 황망한 죽음이었는지 저승에서도 키를 잡은 채 코퀴토스(탄식의 강) 근처를 배회한다는 묘사도 나오게 됩니다.

키를 잡은 채 바다에 빠지는 팔리누로스.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던 아이네이아스는 매우 침통해 했지만, 어찌됐든 바다의 신의 가호 덕분인지 키잡이 없이도 배는 잘 움직여 육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됩니다. 아이네이아스는 팔리누로스의 희생을 기려, 자신들이 도착한 땅 부근을 ‘팔리누로스 곶(Cape Palinuro)’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팔리누로스 곶의 전경.


그리고 그의 이름이 남아 있는 곳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바닷가재(랍스터) 중 한 종류의 학명입니다.


저 팔리누로스 곶이 있는 근처에서 잡히던 바닷가재에게 팔리누로스의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의 이름이 바닷가재에게 붙어있다니 좀 황당하지만, 어쨌든 그에 대해 잘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그림. 팔리누로스의 이름이 붙은 바닷가재(Palinurus interruptus). 구글에 팔리누로스를 영어로 검색하면 가재부터 떠서 당황하게 됩니다. 



아이네이스 속 팔리누로스의 죽음은 바다의 신과 잠의 신의 합작으로 벌어진 비극이지만,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과로로 인해 발생한 졸음에 의한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게 되면, 우울이나 불안 및 졸리움과 피로도가 증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평소보다 여러가지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예를 들자면 4시간 이하로 잠을 잤을 경우엔, 정상적으로 수면했을 때 비해 차 사고를 낼 확률이 15배 이상 올라간다고 합니다(각주 1).

사실 오랜 항해(그것도 나라가 망한 후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불안정한 생활의 연속)로 인해 아이네이아스 일행 모두가 매우 피로하고 지친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와중에, 항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키잡이는 더욱 수면이 부족하고 과도한 긴장과 집중으로 인해 매우 피로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러한 팔리누로스가 솜누스에 의해 잠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잠의 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일시적으로 ‘졸음 운전(항해)’ 상태였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수면이 박탈된 상태에서는, 정상에 비해 훨씬 빠르게 잠에 빠져들 수 있고(각주 2), 수면이 시작되자마자 렘수면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렘수면 상태가 되면, 전신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팔리누로스처럼 앞으로 고꾸라져 바다에 빠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악당 아닌 악당인, 솜누스라는 이름 자체는 조금 낯설지만, 현대 의학에서 ‘수면’에 관련된 용어 속에서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수면다원검사(Polysomnography), 불면증(insomnia), 졸음(Somnolence), 그리고 사건 수면(parasomnia)과 같은 의학 용어 속애서 ‘somn-‘라는 어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솜누스를 묘사한 그림.

히프노스가 로마로 건너오면서 조금 더 부지런한 이미지가 생긴 것인지, 본인의 아들인 모르페우스나 전령신인 헤르메스가 연상되는 날개 아이템을 달고 직접 활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기념비적인 활약이 성실한 키잡이를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라 조금 씁쓸하지만, 잠의 위력을 보여주는 역할은 톡톡히 해낸 것 같습니다.






****각주
1. https://www.sciencedaily.com/releases/2018/09/180918082041.htm

Sleep deprived people more likely to have car crashesA new study indicates that people who have slept for fewer than seven of the past 24 hours have higher odds of being involved in and responsible for car crashes. The risk is greatest for drivers who have slept fewer than four hours.www.sciencedaily.com


2. Practice parameters for clinical use of the multiple sleep latency test and the maintenance of wakefulness test. Littner et al., Sleep. 2005 Jan;28(1):113-21.


매거진의 이전글 신조차도 치료하기 어려운 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