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해장국 삼국지
성시경의 유튜브 <먹을텐데>는 인기도 인기지만 아재들의 술문화를 MZ들에게 긍정적으로 전파한 혁혁한 공헌이 있다. 국밥에 소주를 마시는 행위는 평소 MZ들이 극혐 하는 아저씨 문화였다. 국밥도 별로고 소주는 더 별로인데 그 두 개를 한꺼번에 한다는 것은 노가다 아저씨들의 퇴근길 저녁이나 종로3가 탑골공원에서나 볼 수 있는 만행에 가까운 모습이라 생각하는 MZ들이 많았다. 하지만 먹을텐데에서 성시경은 자신의 단골맛집이자 노포를 골라 다니며 이 국밥이 왜 맛있고 이 집이 왜 유명한지를 한 명의 술꾼이자 입담가로서 내러티브를 펼쳐 내고, 심지어 그 국밥에 소주를 <페어링> 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출했다.
<국밥과 소주의 페어링>
와인과 위스키에서나 어울리는 페어링이란 단어를 이미지의 대척점에 있는 국밥과 소주에도 어울리게끔 만든 건 순수하게 성시경의 공이다. 어디 그뿐이랴? 애미애비도 몰라본다는 속설에서부터 사회적 폐인의 모습으로까지 보이는 ‘낮술’ 역시 성시경은 낭만적인 보헤미안의 모습으로 비치게 만들었다. 원래 술꾼들에게 낮술은 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탈의 매력’으로 선호되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회사 주변 점심시간엔 동료들의 시선 때문에 섣불리 도전하긴 어려운 행동이기도 했다. 그런데 성시경은 페어링이란 형태로 대낮에 국밥에 소주, 평양냉면에 소주, 제육볶음에 소주를 선보이니 이는 MZ들이 보기엔 파스타에 이탈리아 화이트와인, 스테이크에 캘리포니아 레드와인을 곁 드리는 마리아주처럼 신선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작년 말 MZ직원이 많은 음악회사 임원인 후배와 송년회를 한 적이 있는데 이 친구가 갑자기 소주를 맥주 글라스에 달라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요즘 MZ들은 이렇게 마시는 게 유행이라는 답변이었다. 나는 혹시 그 MZ들이 성시경 먹을텐데를 보고 그러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 후배는 놀라며 어찌 알았냐고 되려 내게 물었다.
그랬던 것이다. 소주를 마시는 것도 아재스러운데 그것을 글라스에 마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MZ에게, ‘그냥 이렇게 마시는 게 자주 안 따라도 되고 편해요’라고 무심하게 던지는 성시경의 멘트가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 레트로를 넘어서는 쿨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성시경은 나만이 아는 노포를 많은 이들에게 공개하는 바람에 웨이팅이 엄청나게 생기게 해서 일부 술꾼들에겐 욕을 좀 먹기도 했다. 원래도 인기 있었지만 먹을텐데 이후 더 사람이 많아진 곳 중 하나가 80년대 말 X세대에게도 인기가 있었던 신사역 부근 영동설렁탕이다. 영동설렁탕은 지금도 옆에 넓은 주차장을 보유하고 있어 제법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근처로 운행한 기사님들에겐 아직 택시기사들의 특식 같은 ‘기사식당’으로의 명맥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부터 30여 년 전 영동설렁탕의 강력한 라이벌 기사식당이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지금은 많지 않은 듯하다.
코로나로 인한 영업시간제한이 풀렸을 어느 날 새벽 즈음, 오랜만에 해장을 위해 영동설렁탕을 찾은 적이 있었다. 새벽에 40대 정도 된 여성분이 카운터에 있기에 사장님과의 관계를 물었더니 며느리라고 했다. 며느리란 말에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던 터라 괜한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90년대 초반까지 근처에 영동설렁탕 라이벌이 있었는데 혹시 그곳이 어떤 가게인지 아시냐 물어봤다. 2,3초 간의 생각 끝에 며느님께선 ‘신선설렁탕 아니에요?’라고 답을 했다. 그렇다. 지금은 프랜차이즈 설렁탕집이자 MZ세대 입맛에 좀 더 맞는 국물 맛을 보이는 신선설렁탕이 30년 전 영동설렁탕의 라이벌 기사식당이었다.
잠원역에서 신사역 가는 길에 잠원역에서 좀 더 가까운 곳이 신선이었고 신사역에 좀 더 가까운 곳이 영동이었다. 두 가게 모두 넓은 주차장을 보유하고 있어 강남 방면으로 운행을 한 택시기사들의 기사식당으로 80년대 초반부터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앞서 얘기한 한신포차의 전성기 때 마지막 해장을 하는 코스로도 주당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두 가게는 설렁탕 국물의 극과 극의 맛으로 인해 확실한 매니아층이 갈리는 곳이었다, 영동의 꼬릿꼬릿한 정통 뼈다귀 국물맛에 비해 신선의 국물 맛은 묘하게 버터리 한 맛을 풍기는 퓨전느낌이 있었다. 이거 ‘프리마 탄 거 아니야’라는 당시 장금이급 미각을 가진 친구의 말이 훗날 진실로 밝혀졌지만 하여튼 신선의 설렁탕 맛은 아직 20대 초반이었던 대학생들에겐 고소한 맛이 강해 좀 더 선호되기도 했다.
창업자 아들의 사업수완 덕에 신선설렁탕은 90년 중반 일찌감치 잠원동 본점의 부동산을 정리하고 프랜차이즈화로 나섰다. 지금도 수도권에 제법 많은 프랜차이즈가 있고 밀키트도 공격적인 판매를 하는 걸로 봐선 당시의 선택이 나쁘진 않아 보인다. 그에 비해 영동설렁탕은 2년 전 철푸덕 바닥좌석을 전체 테이블로 바꾸는 인테리어 공사를 한 것 외엔 우직하게 한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영업을 했다. 본점 한 곳만의 매출이라 프랜차이즈화 한 신선에 비해 규모는 작을 수 있겠으나 2010년대 이후 노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강남 해장국 성지 중 한 곳으로 자타공인 인정받게 된다. 지금은 과거의 단골들, 근처 운행한 택시기사, 그리고 강남노포의 명성을 듣고 온 MZ까지 다양한 부류의 손님들로 이른 아침부터 늦은 새벽까지 여전히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두 라이벌 설렁탕집에 비해 유명세는 좀 덜하지만 그 맛과 명성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집이 신사역 인근 <강남따로국밥>이다. 강남따로국밥은 그 브랜드명처럼 <대구식 따로국밥>이 유일한 메뉴다. 술꾼들은 전날 혹은 직전에 먹은 술과 안주 종류에 따라 해장국으로 <하얀국물>을 먹을까 아님 <빨간국물>을 먹을까를 본능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는 오롯이 미각의 문제임에 반해 빨간국물이냐 하얀국물이냐의 문제는 미각에다 영양균형은 물론 소음인, 태양인 등 사상의학까지 결부된 좀 더 종합적인 판단을 요하는 사항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신사역 인근에서 유일한 빨간국물 대안인 따로국밥 메뉴는 절묘한 포지셔닝이었고 실제로도 회나 일식 같은 좀 간이 맹숭맹숭한 것으로 1차를 하고 온 술꾼들에겐 최적의 K해장템이었다.
영동이나 신선처럼 자가부지나 건물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 강남따로국밥은 80년대 이후 근처에서만 세 번 이사를 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 근처에 빨간국물 라이벌인 양평해장국집이 생기는 바람에 유니크함도 많이 상쇄되었다. 그럼에도 X세대에게 강남따로국밥은 얼큰하고 빨간국물의 해장이 땡길 때는 가장 먼저 생각나는 추억의 집 중 하나다. 맛집프로그램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지만 근처 영동설렁탕과는 달리 MZ손님들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듯하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영동설렁탕과 라이벌로 있었던 강남따로국밥의 맛을 MZ세대도 많이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