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한신포차
백종원 대표의 프랜차이즈 브랜드인 ‘한신포차’, 남부터미널역 근처의 ‘한신 VIP 일번지 포차’, 그리고 가로수길의 ‘퀸 실내포차’. 포차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 세 업소에는 한 가지 공통된 사연이 숨겨져 있다. 80년대 중 후반 대한민국 음주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나 너무나 빨리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한신포차에 대한 추억을 소환해 본다.
<일번지>, <영남이 형네>, <삼수갑산>, <라스트찬스>, <역마차>. 이 브랜드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진정 80년대 말의 참음주인이자 음주계의 아이비리그 출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85년 7월에 지하철 3호선이 개통되고 3호선의 한 역인 잠원역도 그때 탄생했다. 당시 잠원역 근처는 아파트 단지와 경원중학교 사이에 논두렁과 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변하는 공터도 여러 곳 있었다. 한신 아파트에 둘러싸인 잠원역에서 대림아파트로(지금은 래미안 팰리스) 가는 길에 특히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잠원역 개통 이후 그 공터에 실내포차가 하나 둘 자리 잡기 시작하여 80년대 말에는 엄청난 불야성을 이루는 대규모 실내포차촌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던 포장마차라 함은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홍식이랑 춘섭이랑 영숙이가 자주 소주잔을 기울이던, 즉 주인아줌마는 말없이 오이를 썰고 퇴근 후 직장인들이 넥타이를 풀고 닭똥집에 소주 한잔을 하던 모습의 이동식 리어카에 포장을 두른 그런 형태였다. 그런데 이 잠원동의 포장마차는 비닐포장이 아닌 가건물의 형태였고 규모도 제법 커서 실내포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잠원역의 위치가 압구정, 서초, 방배 즉 압서방으로 불리는 80년대 최고 유흥지역을 관통하는 철의 삼각지 중간에 위치했기에 이 잠원동 실내포차는 본격 유흥에 들어가기 전 전희로 한잔을 하거나 아니면 유흥을 마치고 헤어지기 전 막잔 한잔의 역할을 하기에 최고의 지정학적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잠원포차의 인기에 한몫을 한 인물은 당대 최고의 연예인이자 연예계 소문난 절친이자 주당이기도 한 조용필과 이주일이었다. 당시 이주일은 압구정동 한양아파트에 살았고 조용필은 서초동 삼호아파트에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중간지점인 잠원포차가 늦은 밤이나 새벽에 한잔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포차 앞에 벤츠가 여러 대 있는 날은 여지없이 이들과 같은 유명 연예인이 온 날이었다.
87년 대입학력고사가 끝나고 처음으로 소주를 배운 곳이 잠원포차였다. 당시 못 마시는 소주를 마시고 하늘이 팽팽 도는 경험을 한 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 짜릿한 첫 경험이었다. 대학교 입학 후 본격적으로 잠원포차에서 술을 마셨는데 1학년때는 소주를 잘 마시지 못해 토닉워터에 소주를 섞어 마시거나 오이를 넣은 오이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자주 가다 보면 열 곳 이상 되는 포차 중 자연스레 단골집이 생기기 마련인데 내 단골집은 <삼수갑산>이었다. 삼수갑산 안주로는 특이하게 삼계탕이 있어서 나는 1차를 포차에서 하게 되면 식사 겸 안주로 삼계탕을 꼭 시키곤 했다. 삼수갑산엔 포차 서빙하기엔 너무 예쁜 아줌마가 있었고 우린 그녀를 <이쁜이 아줌마>로 불렀다. 삼계탕을 주문하며 꼭 찹쌀을 많이 넣어달라는 깜찍한 커스터마이징 주문을 하던 대학교 1학년 짜리 애가 귀여웠는지 그 이쁜이 아줌마는 특히 날 예뻐했던 것 같다. 삼수갑산의 이쁜이 아줌마는 <TV는 사랑을 싣고> 같은 프로그램이 아직 있다면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분이기도 하다.
88 올림픽에도 살아남았던 잠원포차는 <범죄와의 전쟁>의 고비는 넘지 못했다. 90년 범죄와의 전쟁선언 1년 전인 89년부터 이미 불법, 무질서, 소비향락 타파의 기치를 들었던 6공 정부에 의해 잠원포차는 89년 여름 5년 여의 불꽃같은 시절을 마치고 그 운명을 다하게 된다. 잠원동 공터에서 무허가로 운영되었기에 어찌 보면 잠원포차의 운명은 이미 유한한 것이었다. 잠원동에서 철거가 시작되자 포차들은 서초동 삼호가든 상가나 잠원성당 인근, 아니면 잠원동 거목상가 등 여러 곳으로 흩어져 그 명목을 이어갔다.
잠원역에서 대림아파트로 좌회전하는 방향에 위치했던 <일번지> 포차는 그 코너-스위트의 위치와 가장 큰 규모 그리고 가장 먼저 생긴 원조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 글의 앞에 얘기한 남부터미널 근처의 ‘한신 VIP 일번지 포차’가 당시의 일번지 포차 사장님이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곳이다. 몇 년 전 미우새에서 김건모가 자주 가는 포차로 잠시 뜬 적도 있었다.
그리고 가로수길의 ‘퀸실내포차’는 일번지에서 주방이모를 담당하던 분이 독립하여 차린 업체로 간장새우와 병어조림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퀸포차 사장님과 몇 년 전 얘기 한 적이 있는데 80년대 잠원포차의 앵커-테넌트인 <일번지> 출신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듯했다. 그것은 많은 호텔 셰프 출신 스시집 중 신라호텔 아리아케 출신들이 누리는 프라이드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아마 80년대 말 잠원포차의 단골고객이었던 듯한 백종원 대표가 잠원포차의 또 다른 별칭이었던 한신포차를 브랜드화하여 1998년 한신포차를 논현동 영동시장 내에 오픈했다. 조선의 김홍도, 신윤복, 일본의 샤라쿠처럼 짧은 기간에 엄청난 족적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잠원포차, 한신포차라는 브랜드가 많은 주당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게 된 것은 백대표 덕분이었다.
강남의 술꾼들을 한날한시 동일 장소에 모이게 했던 잠원포차가 사라지자 주당들은 한동안 멘붕에 빠졌다. 대학가나 강남 등지에서 잠시 반짝했던 민포카(민속주점, 포차, 카페)는 그 혼종의 아이덴티티 때문에 술꾼들 선호도에서 주류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 80년대 말 압구정 성당 뒤 ‘매화’, ‘일광’ ‘길손’ 같은 일식집에서 토닉워터에 레몬을 섞은 레몬소주를 팔며 꼬치구이를 내놓았는데 언젠가부터 이런 류의 식당을 ‘로바다야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1990년, 청담동의 대표 카페인 웨스트우드가 ‘가인’이라는 대형 로바다야키로 변신하며 드디어 로바다야키의 시대가 열렸다. 지금은 이자카야라는 제대로 된 일식주점 명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손님 앞에서 화로로 생선이나 꼬치 등을 바로 구워 주던 형태를 말하는 로바다야키가 왜 당시 일식주점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참 의아한 일이다.
나는 군대를 3학년 마치고 갔기 때문에 확실히 1990년도 까지는 서울시내에 노래방이 없었다는 걸 기억한다. 그렇기에 89년 정도인가 구정고등학교 건너 압구정 웬디스 옆에 생긴 ‘현대 가라오케’의 등장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는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도 무반주에 젓가락을 두드리며 트로트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음주가무의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오리지널에 가까운 반주에 맞춰 마이크를 들고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마차가 끄는 말의 시대를 지나 말이 없는 마차인 자동차의 등장과도 같은 일대 혁신이었다.
당시 가라오케의 모습은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이 마이웨이를 부르는, 말발굽 형태의 부스에 마스터가 반주 테이프를 틀어주는 형태였다. 이런 형태의 가라오케는 곧이어 등장한 노래방 때문에 잠원포차의 운명처럼 2,3년 반짝 인기를 누리고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세가 된 마이크를 들고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는 행위를 처음 경험한 세대 역시 90년대 초반의 X세대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