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이 다가오면 아이들에게 던지는 물음이 있다.
“세종 임금이 한글을 만들기 전에는 우리 말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없었어요.”
어쩌다가 있었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으나, 대부분은 없었다고 대꾸한다.
“그러면, 그 전에 우리는 무슨 말을 쓰면서 살았을까요?”
“한문!”
칠판에 크게 적었다.
㉠sarang
㉡사랑
㉢love
㉣러브
㉤애
㉥愛
이렇게 써놓고 다시 물어본다.
“이 가운데 우리 말을 찾아봐요.”
㉡㉣㉤이라는 아이들도 있고, ㉡㉣이라는 아이들도 있고, ㉡이라는 아이도 있다. ㉠이 우리 말이라는 아이는 잘 없다. ㉠도 우리 말이라고 하면 아이들은 아니라고 우긴다.
‘sarang’을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하면, 모두 [사랑] 하고 소리 낸다. 그제야 ‘sarang’이 우리 말이라고 하는 아이가 나온다. 아직도 그게 어째서 우리 말이 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이들이 많다.
㉠은 우리 말을 로마글자로 적어 놓았고, ㉡은 똑같은 우리 말을 한글로 적어 놓았고, ㉣은 영국말을 한글로 적은 것이고 ㉤은 중국말을 한글로 적은 것이라고 하면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세종 임금이 만든 것은 우리 말일까, 글일까, 글자일까?”
‘글’이라는 아이도 있고 ‘글자’라는 아이도 있다.
“말은 뜻을 소리에 실어서 드러낸 것이고, 글은 말을 글자로 붙잡아 놓은 것이지요.”
• 뜻 + 소리 ===> 말(입말)
• 뜻 + 글자 ===> 글(글말)
“그러니까 글자는 말소리를 붙잡는 기호인 셈입니다. 말을 ‘입말’이라 하고, 글을 ‘글말’이라고 하지요. 말이나 글이나 다 똑같은 말인데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말은 입말이고, 손으로 쓰고 눈으로 읽는 말은 글말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오랫동안 입말로만 살아오다 글자를 만들어 쓰면서 비로소 글말이 생겨났지요.”
이렇게 이야기해 주고 나면 세종 임금이 만든 것이 ‘글’이 아니라 ‘글자’ 스물여덟 자라고 똑똑히 안다.
“세종 임금이 한글을 만들기 전에는 정말 우리 말이 없었을까요?”
“아뇨. 우리 말은 있었어요.”
“그러면 뭐가 없었을까요?”
“글자가 없었어요.”
“우리 글자가 없으니까 당연히 뭐도 없었을까요?”
“우리 글도 없었어요.”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이런 나라들도 모두 제 나라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없어 이웃 이탈리아 글자 ‘로마자’를 빌려 쓰는데, 우리는 세종 임금 덕분에 우리 글자 한글을 쓰고 있으니 참 고맙고 자랑스럽지요?”
“예.”
“흔히 ‘로마자’를 영문자라 하는데 틀린 말입니다. ‘로마자’ 주인이 영국이 아니거든요. 로마자는 이탈리아가 주인이지요. 영국도 독일도 프랑스도 스위스도 스페인도 모두 이탈리아 글자 ‘로마자’를 수입해서 씁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말은 6~8천 가지나 되지만, 그 말을 적는 글자를 가진 나라는 몇 안 됩니다. 우리는 세종 임금 덕에 우리 글자를 가졌지요. 그것도 아주 빼어난 소리조각(음소) 글자를 가졌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이번에는 글자 이야기로 조금 더 이어갔다.
“말은 하느님이 사람에게만 주신 선물이라 뜨레(등급)가 없지만, 사람이 만든 글자는 좋고 나쁨이 있어요. 마치 가방에 명품과 짝퉁이 있듯이. 중국 한자는 ‘뜻글자’라 글자 가운데서 가장 낮은 뜨레입니다. 뜻글자다 보니, 적게는 몇천 자에서, 많게는 몇만 자씩 익혀야 글을 쓸 수 있어요. 일본 ‘히라가나’는 소리덩이(음절) 글자로 뜻글자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소리조각 글자에는 훨씬 못 미칩니다. 음절마다 글자가 하나씩 있어야 하니, 히라가나 50자와 가타카나 50자로는 턱없이 모자라 한자를 쓸 수밖에 없어요. ‘로마자’와 우리 ‘한글’은 같은 소리조각 글자이긴 하나, 이 둘을 놓고 가리면 ‘한글’이 더 나아요. 한글이 더 나은 까닭은 손전화 글자판을 두들겨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지요.”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36년 동안이나 일본 식민지를 살았고, 육이오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왜얼이(토착왜구)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우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한강의 기적’이니 ‘새마을운동’ 덕이라느니 하지만 모두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일본 사람들도 그 비밀을 알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을 나는 알고 있다. 바로 ‘한글’이다.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힘을 되찾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것도 그 바탕이 한글이었고, 오늘날 한류 열풍으로 겨레의 지혜를 온 세상에 드날리는 힘도 그 바탕은 한글이다. 한글 덕으로 핸드폰도 잘 만들고,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도 잘 만들고, 영화나 드라마도 잘 만들고, 반도체도 잘 만들어 세상에서 앞서가는 겨레가 되었다. 한글이 있었기에 우리 말꽃(문학)이 온 세상에 이름을 떨쳐 노벨상을 받았고, 한글로 말미암아 우리 삶꽃(문화)이 이름을 날리고, 한글 덕분에 우리 앎꽃(기술문명)이 일본을 앞질러 나간 것이다. 지금도 제나라 글자가 없는 겨레는 아이들이 학교 교육을 받으려면, 제 모국어를 버리고 영어부터 배워야 한다. 교과서가 영어이고, 교사가 가르치고 학생이 배우는 말이 영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야말로 학문을 제 나라말로 못하는 빼 아픈 일이 빚어지는 거다. 이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노벨상을 받아 보겠나 싶다. 우리가 한글 없이 아직도 한자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하다. 아마 중국이나 일본에 빨려 들어가 지금쯤 자취도 없는 겨레가 되었을 터이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거느리기도 했고, 일찍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한때 세계 경제 대국 반열에 올랐던 일본이 왜 우리에게 따라잡혔을까. 일본 사람들이 쓰는 히라가나 글자와 우리가 쓰는 한글은 뜨레부터가 다른 글자이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 글자는 소리덩이 글자이고 우리 글자는 소리조각 글자이다. 히라가나는 50자를 가지고도 말을 적기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한글은 24자만 해도 너끈하다. 핸드폰으로 치면 2G와 5G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비밀이 글자에 있다는 사실을 일본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지 싶다. 글자는 정보를 나누고 모으고 하는 도구이니까, 글자가 부리기에 손쉽고, 쓰임새가 빼어나면 놀라운 일을 해낸다. 일찍이 4대 문명이 일어났던 곳은 모두 글자가 있었고, 서양 문명이 앞서나갔던 까닭도 빼어난 글자인 로마자 때문이었다. 한글의 힘으로 우리 겨레가 온 누리에 힘을 떨치는 이 수수께끼를 두고, 나는 이름하여 ‘한글 근대화론’이라 말하고 싶다.
세종 임금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 웃대가리(기득권세력) 양반들은 모조리 안 된다고 임금에게 대들었다. 먹고살기 바쁜 백성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어려운 한자가 지네들 부른 배를 단단히 지켜주었으니까. 그래도 세종이 한글을 누리에 내놓자, 모두 비웃으며 보란 듯이 한자 한문을 떠받들어 썼다. 그 당시 깨어있는 든사람(지식인)으로 손꼽는 정약용이나 박지원조차 한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선은 한자 한문 때문에 망했다. 다른 세력에게 정권을 넘긴 게 아니라 아예 일본에 나라를 갖다 바쳤다. 헐버트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조선 후기에 한문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캐보았더니 국민 가운데 2%였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세상의 절반인 여자들 지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남자들 가운데 백에 두 사람 지혜로 꾸린 나라가 안 망하고 어떻게 버티겠는가? 그 한자 몰아내고 한글 쓰는 데 500년 걸렸다. 참으로 뼈아프고 눈물겨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