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러야 글이 나온다

by 구자행

저는 올 8월에, 이제 나이를 다 채우고 학교를 떠납니다. 마침 때맞추어 양철북 출판사에서 그동안 제가 쓴 교실 이야기를 묶어 책으로 내 주었어요.

책 이름은 <구자행님 신인류 사랑>입니다.

머리글을 여기 옮겨봅니다.



머물러야 글이 나온다


영화를 보다가 가끔 애가 탈 때가 있지요. 총알이 빗발치고 옆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나쁜 놈들은 몰려오는데, 그 숨 가쁜 때에 사랑하는 두 사람은 마치 번갯불에 콩이라도 구워 먹듯이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속삭이지요. 세상 시간은 돌아가도 두 사람 시계는 그 자리에 딱 멈춰 서 있지요. 글쓰기가 그렇다 싶어요. 어디로 달려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날마다 애바쁘게 앞만 보고 달리지요. 한때도 제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이런 우리 마음을 잠시 멈춰 세우는 게 글쓰기구나 싶어요. 글은 아주 짧은 한순간을 길게 늘어뜨려 영원에 가닿게도 하고, 눈에 보일 똥 말 똥한 조그만 일도 크게 키우고 넓혀서 환하게 펼쳐 보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어야 글이 나오고, 거꾸로 글은 우리를 그 자리에 멈춰 세워 잠시나마 머물게 해 줍니다.

어설픈 글이지만 제가 글을 쓰게 된 빌미는 아이들입니다. 선생 노릇을 한 지 10년 남짓 지나서 이오덕 선생님을 만나 글쓰기에 눈을 떴습니다. 선생님을 좇아서 교실에서 아이들과 자라온 이야기를 쓰고 시 쓰기를 하였습니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하면서 저도 교실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이야기를 글로 남겼습니다. 아이들에게만 글 쓰라고 시키고 저는 팔짱 끼고 앉아 있자니 뒤가 켕겼던가 봐요.

그런데 또 10년쯤 지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들한테 소리 지르거나 화내는 일이 사라졌고, 교실에서 아이들과 웃을 일이 많아지고, 아이들과 가까워졌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아이들이 쓴 글을 내가 읽어 주듯이, 아이들도 내가 쓴 글을 읽고 맞장구쳐 준다고 생각하니 글 쓰는 일이 가슴 뛰는 일이 되었지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딴사람으로 감쪽같이 탈바꿈한 거지요. 글을 쓰면서 아이들이 자라듯이 저도 훌쩍 자랐구나 싶었어요. 생각이 자라고.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느림보 아이를 느긋하게 기다려 줄 줄도 알고. 모르긴 해도 제 글이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일게 하는 데도 한몫했지 싶어요.

점심시간 운동장을 걷다가 옆에 젊은 선생들한테 이렇게 물을 때가 있어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가슴이 뛰나요?”

다들 고개를 저어요.

가슴이 답답하다고도 하고, 선생 노릇하기 참 힘들다고 해요. 그러면 또 묻지요.

“처음 아이들을 만났을 땐 가슴이 뛰지 않았나요?”

그랬던 것 같다고 아주 먼 옛날 이야기하듯이 고개를 끄덕여요.

그러고는 되받아 묻지요.

“선생님은 뛰세요?”

어디 저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겠어요. 그렇지만 저는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는 정말로 가슴이 뜁니다. 아이가 쓴 글을 읽다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슬그머니 일어나 혼자 걸었던 적도 있고요, 아이가 쓴 글이나 내 글을 가지고 교실로 갈 때는 발걸음부터 달라요. 제 글이나 아이들 글을 함께 읽고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참 많이 웃었어요.

아이들과 지내는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아이들에게 마음이 머물기도 하고, 서로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제 마음을 다독이거나 다잡기도 했지요. 정말이지 아이들 덕분에 40년 넘게 선생 노릇 흐뭇하게 했구나 싶어요.

좋은 벗이 되어 준 우리 아이들이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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