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어떻게 생겼을까?

by 구자행

새로 즈믄해(새천년)를 맞이하면서 글쓰기 배움터에서 빗방울 선생님을 모시고 우리말 이야기 듣는 자리를 마련했지요.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날 국어교사모임 배움터에 가셔서 말씀하기로 날이 잡혀 있었기에, 제가 선생님을 모셔다드린 적이 있습니다. 무너미에서 저녁밥을 먹고 선생님을 옆자리에 태우고 차를 몰았습니다. 국어교사모임 배움터는 속리산에서 열었는데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은 두 시간 남짓 되었지 싶어요. 저는 차를 몰고 선생님은 옆자리에 앉아서 긴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지요. 그때 들은 이야기가 ‘마음’과 ‘얼’이었습니다. 그 뒤에 다른 데서 말씀하시기도 하고, ≪우리 말은 서럽다≫ 책에도 쓰셨지요. 아마 저한테 가장 먼저 말씀해 주시는 듯했습니다. “내가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말씀을 꺼내신 걸로 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말교육대학원’이나 ‘입말교육연구회’ 같은 데서 앞서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이야기를 다시 풀어 봅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과 <얼>이 한데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목숨이지요. 그런데 ‘몸’이나 ‘마음’은 알겠는데 ‘얼’이라 하니 낯설게 느껴지는 분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얼>은 ‘얼간이(얼이 어디로 가버린 사람)’ ‘얼빙이(얼이 빈 사람)’ ‘얼뜨기(얼이 하늘 높이 뜬 사람)’ ‘얼빠진 녀석(얼이 빠져나간 사람)’ 같은 우리 말에 아직도 남아 있는 말입니다.

하여튼, <몸>은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누구나 바로 압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요즈음은 몸속까지도 환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마음>은 다릅니다. ‘몸’과 찰싹 달라붙어 있는 줄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그게 어디 붙었는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또 몇 겹으로 싸여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요.

<마음>은 마치 양파 껍질처럼 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맨 바깥에 ‘느낌(감정)’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바로 안쪽에 ‘생각(관념)’이 자리하고 있고, 가장 안쪽에 ‘뜻(신념)’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속 어딘가에 있는 마음은, 그 가운데 몸과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게 ‘느낌’이고, 그다음이 ‘생각’이고, 가장 몸과 떨어져 있는 게 ‘뜻’인 셈이지요.


<느낌>은 부드럽고 거칠고, 시끄럽고 조용하고, 쓰고 달고 맵고 짜고, 춥고 덥고, 하는 몸 울림이지요. ‘느낌’은 우리 몸과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까닭에 ‘생각’이나 ‘뜻’보다 앞서서 일어나고 출렁거림 또한 잦습니다. 몸 바깥 누리(세상)에서 펼쳐지는 일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입으로 먹거나, 코로 냄새 맡거나 하면 바로 느낌이 일어납니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방 안에 있을 때는 따뜻했는데, 문을 열고 나가면, 몸이 으스스 떨리면서 곧바로 춥다고 느낍니다. ‘생각’은 느낌에 뒤따릅니다. ‘옷을 좀 두껍게 걸치고 나올 걸 내가 생각이 짧았네.’ 하고 되짚어 보는 건 ‘생각’이지요. 더운 여름철에 방 안에 있으면, 몸에 땀이 나면서 곧장 덥다고 느낍니다. 그러고 나서 ‘생각’으로 들어서지요. ‘창문을 열까, 선풍기를 틀까, 에어컨을 켤까, 옷을 훌러덩 벗을까, 찬물로 몸을 씻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느낌’은 하루에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자주 일고, 출렁거림도 아주 잦지요.

<느낌>은 몸과 찰싹 달라붙어 있어 기쁘면 웃고, 슬프면 눈물 나고, 성이 나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괴로우면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그래서 사람 얼굴이나 눈빛만 봐도 그 사람 마음속 느낌이 어떤지 쉽게 가늠할 수 있지요. 눈치 없는 남편은 언제나 그게 무뎌서 탈이지만. 사람들은 이 느낌을 들키지 않으려고, 흔히 ‘표정 관리’라는 걸 해 보지만, 배우도 아니고 속내를 감추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요. 어쨌든 ‘느낌’은 우리 ‘마음’ 가운데서 가장 바깥, 그러니까 마음 가장자리에 있기에 몸과 떼래야 뗄 수 없는 사이인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생각>은 맞고 틀리고, 알고 모르고, 같고 다르고, 옳고 그르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것들을 가리는 힘입니다. 우리 몸이 누리에서 펼쳐지는 일에 부딪히면 곧장 일어나는 ‘느낌’과 달리, ‘생각’은 느낌을 거쳐서 빚어지는 마음 움직임입니다. 무엇을 사야 할지, 이 일이 옳은 일인지, 어디에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결혼이란 걸 해야 할지, 혼자 살아야 할지를 가려내는 힘입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은 느낌을 거쳐서 일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느낌’을 거치지 않고 곧장 ‘생각’ 마당으로 들어서기도 합니다. 친구가 짝벗(결혼) 맺는 것을 보고서, 부럽기도 하고 외롭기도 해서, 나도 좋은 사람을 찾아 짝벗을 맺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무런 느낌 없이도 짝벗을 맺어야 할지 혼자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느낌’은 다른 사람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생각’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 말해 주지 않으면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지요. ‘느낌’보다 한 겹 안쪽에 있기에 좀처럼 낌새를 눈치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쉽게 눈치챌 수 있는 ‘느낌’을 잘 감추는 사람은 약삭빠른 사람이지만,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굴리는지 쉽게 들키는 사람은 좀 모자라 보이지요. 아무튼 ‘생각’은 말로 펼쳐서 보여주어야 알 수 있습니다.


<뜻>은 흔히 ‘신념’이라고도 하고 ‘의지’라고도 하는 것인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할 때 그 ‘뜻’입니다. ‘느낌’을 지나고 또 ‘생각’을 거쳐야만 들어설 수 있는, 마음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파로 치면, 노란 껍질인 ‘몸’을 벗겨내고, 그 안쪽에 있는 푸르스름한 껍질인 ‘느낌’을 벗겨내고, 또 그 안쪽에 하얀 껍질 ‘생각’을 벗겨내면 나오는 알맹이인 셈이지요. 옳고 그름을 가리고, 할 말과 못할 말을 가리고, 또 일에 값어치를 매기는, 이러한 생각들이 모이고 자라나서 ‘뜻’이 됩니다. 그래야 ‘뜻’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오덕 선생님 책을 읽고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일고, 그래서 글쓰기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깊이 생각한 끝에, ‘삶을 가꾸는 글쓰기에 힘을 쏟으며 살아야겠구나!’ 하는 뜻을 세우는 거라고 봅니다.

‘뜻’을 세우지 못한 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히틀러처럼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나쁜 뜻을 세우는 사람도 있지요. ‘뜻’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제 이익을 좇아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느낌’을 알뜰히 가꾸고, ‘생각’을 올바르게 해야 ‘뜻’을 제대로 세울 수 있는 거지요. ‘뜻’을 세우게 되면, 거꾸로 ‘뜻’이 ‘생각’과 ‘느낌’ 다스리고 부리게 됩니다. 너무 배가 고파 빵을 훔쳐 먹을 생각을 냈다가도, 굶어 죽을지언정 어떻게 남의 것을 훔치겠나 하면서, 훔치겠다는 생각을 누르고, 배고픔을 참아내는 거지요. 그래서 ‘뜻’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 사람 삶이 달라지게 마련이고, 어떤 ‘뜻’을 지니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 값어치를 매기게 됩니다. 돈이나 자리나 얼굴 생김새가 아니라 ‘뜻’이 사람 값어치를 매기는 잣대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느낌’은 몸과 가까이 붙어있어 출렁거림이 잦지만, ‘생각’은 느낌처럼 종잡을 수 없이 바뀌지는 않아도 가끔 생각을 바꿔 먹을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뜻’은 한번 세우게 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좀처럼 굽히지 않지요. 성삼문은 불에 달군 인두로 살을 태워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세종 임금은 웃대가리(기득권세력)들이 그렇게 딴죽을 걸고 어깃장을 놓아도 씨알(백성)들을 가엽게 여겨 한글을 누리에 내놓았지요.

‘느낌’은 몸에 곧바로 드러나기에 남들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생각’이나 ‘뜻’은 말해 주어야 알 수 있고, 또 그 사람이 사는 삶을 보고서 헤아려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은 알 수 없더라도 스스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뜻을 세우고 사는지, 누구나 제 마음속은 환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 안에 그게 있기나 한 건지,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알아차리기 어려운 무엇이 있는데 그게 바로 <얼>입니다. 그럼 ‘얼’이 있는 줄 어떻게 아느냐? 하고 물을 수 있겠지요. 앞서 말했듯이 우리 겨레가 ‘얼’이라는 말을 쓰면서 살아왔지요. 얼이란 말을 쓰면서 살았다는 것은 사람 안에 얼이란 게 깃들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는 말이겠지요.

‘얼’은 ‘아ᆞ갈’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ᆞ갈’이 ‘알’이 되기도 하고 ‘얼’이 되기도 했습니다. ‘알’과 ‘얼’은 뿌리가 같은 말이지요. 우리 말 ‘알’은 목숨을 이루는 씨앗입니다. 푸나무는 ‘씨앗’에서 싹이 돋아나 목숨을 이루어 자라지만, 물고기나 짐승들은 ‘알’에서 깨어나 목숨을 이루고 살지요. 그런가 하면 우리 사람은 ‘얼’을 씨앗으로 누리에 태어나 목숨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얼은 사람만이 가졌습니다. 사람만이 지녔기에, 푸나무와 짐승은 목숨이 다하면 ‘죽는다’고 하고, 사람은 목숨이 다하면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본디 왔던 곳으로 간다는 말이지요. 이때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바로 얼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목숨이 다하면, 먼저 몸이 움직임을 멈추고, 몸이 굳어지면 느낌이나 생각이나 뜻도 몸 따라서 사그라듭니다. 그러나 ‘얼’을 몸을 빠져나와 본디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얼은 나고 죽음이 없이, 길이길이 살아남아 다음으로 또 그다음으로 이어져 내려갑니다.

몸을 벗어난 ‘얼’을 우리 겨레는 ‘넋’이라고 하면서 ‘얼’과 말을 달리했습니다. 몸에 깃들어 있을 때는 ‘얼’이지만, 몸이 죽어 얼이 빠져나오면 그때부터는 ‘얼’이 아니라 ‘넋’이 됩니다. 옛 노래에는 ‘넋’이란 말이 자주 보입니다.


넉시라도 님은 한데 녀져라

(죽어 넋이라도 임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백골이 진토 되여 넉시라도 있고 없고

(죽어 몸뚱이가 썩고 뼈가 흙먼지가 되어, 넋이야 있든지 없든지 하더라도)


우리 무교에서는 넋이 깨끗해야 본디 왔던, 누리 너머 그곳으로 홀가분하게 돌아간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살았을 적에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사람은 넋에 때가 끼어 깨끗이 씻어주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지요. 그래서 오구 서낭에게 맡겨 넋을 달래고 씻겨서 데려다 달라고 하는 굿이 바로 ‘오구굿’입니다. 얼이 몸과 마음에 들어와 있을 적에, 온갖 고달픈 삶에 허덕이면서 때도 묻고 흠도 생기고 했을 테지요. 그런 때와 흠을 씻어내어 본살 같이 되돌려 놓지 않으면, 보내 주신 분이 기꺼이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흠 생기고 때 묻은 넋을 씻는 굿을 ‘씻김굿’이라 하는데, 그 때를 씻어내는 아픔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다고 해요. 누리 너머에서 받아야 하는 넋 씻김 아픔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면 살아생전에 몸으로, 또 마음으로 못된 짓을 저질러서 얼에다 때를 묻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해요.

빗방울 선생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고, 선생님 말씀을 듣는 일은 참으로 기쁘고도 흐뭇한 일이었지요.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또랑또랑한 목소리, 별빛 같고 물방울 같은 눈빛, 봄햇살 같은 맑은 웃음도 환하게 그려집니다. 선생님 이야기는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고, 흘러도 흘러도 끝나지 않는 가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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