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종(忍從)인가 으름장인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우리의 고대 시가인 '가시리'와 '아리랑'의 맥을 잇는 이별가의 백미로서 김소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작품 속에 우리 민족의 원형과 부합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 어쩔 수 없는 ‘이별’의 모티브가 기본축으로 자리해 있는데, 이때 떠나보내는 자의 가슴속에는 ‘한’의 정서가 간직되어 있다. 그것은 이 작품 속의 화자, 곧 님을 떠나보내는 자가 이별의 상황 앞에서 그것을 자학과 체념과 인내로 넘어서고자 하는 데서 만들어진 정서이다.
- 권영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이 작품에 대한 가장 전통적이며 일반적인 해석을 요약하고 있는 글입니다. 이 해석에서 여성인 시적 화자는 지금, 돌연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한 뒤 곧 떠나게 될 임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별을 마치 운명이라는 듯이 체념하며 받아들입니다(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모든 것이 임을 싫증나게 한 자기의 모습이나 자신이 깨닫지 못한 실수 때문이라(나 보기가 역겨워) 여기고, 너무도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상황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1연-이별의 체념)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한창인 이 근방(영변의 약산)의 대표적 명물 진달래꽃을 한 아름 따다가 임이 가시는 길에 뿌려서 그 앞날을 축복해 드리겠다고도 합니다. (2연-떠나는 임에 대한 축복)
그리고 임이 그 진달래에 담긴 내 사랑과 축복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3연 – 슬픔과 원망을 넘어선 사랑)
자신은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이 슬프지만,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여겨 받아들이고(나 보기가 역겨워) 임이 가시는 길에 결코 부담을 주지 않겠다(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는 것입니다. [4연-애이불비(哀而不悲). 인고(忍苦)의 의지)]
이렇게 해서 이 해석의 주제는, 여성은 남편과 아들을 위해서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자신의 탓이나 운명이라 여기고 기꺼이 참고 견디고 희생한다는 이른바 유교적 휴머니즘이 됩니다. 그렇게 내면화된 응어리가 곧 한(恨)입니다.
1990년을 전후해서 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제법 널리 퍼져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가실 때에는’을 ‘if ~’로 생각합니다. 즉 이 작품의 이별을,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서 커플은 지금 사랑의 행복이 절정에 달해 있습니다. 문득 여성 화자에게 이 행복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들고, 화자는 그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합니다. 이별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때 일어날 일을 예고함으로써 임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깨진다면 그것은 100% 임 때문일 테니까요.
전제된 시적 상황은 다 같지만 디테일은 해설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나는 화자의 으름장으로 일어나게 될 임의 내면에 초점을 두려고 합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화자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임은 결코 마초는 아닐 듯합니다. 그런데 이 절정의 행복에서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별의 상황을 화자가 갑자기 가정하고 나서니, 임은 얼마나 당혹스러울까요. 게다가 그 원인을 '나를 보는 것이 역겨워져서'라고 애먼 소리를 하고, 자기는 그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고까지 합니다. 이쯤 되면, '이 사람에게 우리 관계가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당혹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게 될 듯합니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진달꽃으로 뒤덮혔던 영변의 약산은, 두 사람의 행복했던 기억으로 가득한 곳일 터입니다. 그런데 그 약산의 진달래꽃을 가득 따다가, 떠나 가는 내 발길 앞에 뿌리겠답니다. 모든 추억을 내던져 버리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그리고는 발 앞에 놓인 꽃을 내려밟고 가랍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뜻일 테니 당신의 발길로 그 모든 사랑의 추억을 폐기하라는 말인 듯합니다. 여기서는 '사뿐히'도 냉혹할 정도로 무심할 임의 태도에 대한 비난이 됩니다. 이런 이별의 길이라면, 임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인데도 벌써 가해자가 된 듯한 죄책감에 휩싸일 듯합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일어날 수 있는 이별에도 오히려 담담해 하고, 나에게 추억의 진달래꽃 한 아름을 눌러 밟고 지나게 하는 요식으로 모든 사랑을 리셋해 버릴 듯한 화자의 태도에, 임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연에는 반전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별로 자신이 느끼게 될 슬픔이 치사량에 육박할 정도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아니'라는 부사를 '흘리오리다'가 아니라 '눈물'이라는 명사 앞에 둔 것도 이러한 고백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 마지막 연에 세심한 사랑의 고백을 장치함으써, 두려움을 느끼는 임을 안심시키고 변치 않는 사랑을 다짐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작품의 주제는 이별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화자의 으름장이 됩니다.
치마폭에다가 이도령에게 사랑의 서약을 받는 '춘향전(남원고사)' 속 춘향의 적극적인 모습이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절정을 경험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거나 들어 보았을 말, '바람 피우면 우리 둘 다 죽는 줄 알아!'라는 으름장이 생각나면서 공감을 갖게 되는 해석입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