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송이 국화꽃이 피기까지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작자는 이 시에서 한국 중년 여성의 안정미(安定美)를 표현했다고 하여 제3연의 '누님'이 그 주제적 모티브가 된다고 하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국화'의 상징성도 중요하다. 이 시에서 우리는 국화가 피어나는 과정을 통하여 한 생명체의 신비성을 감득할 수가 있다. 찬 서리를 맞으면서 노랗게 피는 국화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표상되고 있다. 봄부터 울어대는 소쩍새의 슬픈 울음도, 먹구름 속에서 울던 천둥소리도, 차가운 가을의 무서리도 모두가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시적 발상법은 그 스스로 생명파로 자처하던 초기사상과도 관련되고 있다.
- 이응백, 김원경, '국어국문학자료사전' -
화자는 '봄-여름-가을'의 생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 서리 가운데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는 국화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송이 꽃의 개화가 우연한 번쩍임이 아니라 긴 누적의 결실이라는 통찰에 도달합니다.
3연에서는 국화꽃을 원숙한 아름다움을 갖춘 '누님'에 비유하고 있는데, '누님'을 수식하고 있는 말들이 자세할 뿐더러 그 말들이 앞선 국화의 성장 과정과 대응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시간축(봄의 소쩍새–여름의 천둥–가을 밤의 무서리)과 인간의 정서축(그립고 아쉬움, 젊음의 뒤안길)을 나란히 놓고 있는 것인데, 이로 보면 형식적으로는 '누님'이 비록 꽃의 비유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꽃과 같거나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제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화자는 한 존재(한 송이의 국화꽃. 내 누님)가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피우기 위해) 아주 긴 준비의 시간이(봄부터)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합니다(보다). 국화꽃으로 말하면 발아 또는 잉태의 시간(봄)에 생명을 밀어 올리는 미세한 촉발(소쩍새의 울음)에서, '누님'으로 말하면 어린 시절(봄)에 갖게 되는 새로운 인간, 사물과의 인연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소쩍새의 울음)에서 존재의 발현이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보다'가 반복되면서 관점이 '한 송이'로 집중되고 리듬감도 생겨납니다.
화자는 봄에 비롯된 존재가 아마도 여름일 시간에 강력한 힘의 도움(천둥)을 받으며 격렬하게 성장하게 된다고 여깁니다. '먹구름 속의 천둥'은 그 힘이 압축되어 폭발하는 지경까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누님'으로 말하자면, 그리움이 넘쳐 평상심이 흔들리는 시간, 격정과 갈등의 시간일 것입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화자는 '국화꽃'의 성장과 개화의 과정을 '누님'이 원숙한 여인으로 설 때까지의 성장 과정과 같다(내 누님같이 생긴 꽃)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누님의 지난 날은 '새로운 인간과 사물에 대한 그리움, 그로 인한 갈등과 격정의 상태'일텐데, 이는 1, 2연에서 '소쩍새 울음, 먹구름 속의 천둥'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누님'은 이제 청춘에서 멀어져(머언 먼 젊음) 냉철한 자각과 절제를 가지고(거울. 국화의 무서리에 해당) 자신의 지난 모습(뒤안길)을 성찰할 수 있는 현재에(거울 앞에 선) 이르렀습니다. 국화로 말하자면, 4연의 '간밤엔 무서리(차가운 기운, 개화의 마지막 시련)가 저리(저렇게) 내리고'에 해당하는 단계일 것입니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노란'이 '노오란'이 되어 색채를 밝게 하고 개화 직전의' 숨 고르기를 느끼도록 하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말하자면 4연은 가을로, 1,2연의 봄, 여름의 다음 순서인 3연에 있어야 합니다. 1,2,4연의 결과가 3연인 것입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개화의 순간을 극적으로 제시하며 마무리하기 위해 3연으로 가야 할 내용을 4연으로 도치시켰을 것입니다.
'무서리'는 성숙을 완성시키는 차가운 기운으로 개화의 마지막 조건이고, '누님'에게는 감정의 열을 식혀 내면의 결을 단단하게 하는 차분한 자각과 절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3연의 '거울'에 상응할 것입니다.
화자는 이 개화의 순간에 이르러 관찰자가 아니라 이미 참여자가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는 바로 그때 화자가 느꼈던 기대와 긴장의 표현입니다.
국화의 개화는 우연한 성취가 아니라 긴 축적의 결실이며, 그 과정이 ‘누님’의 성숙과 대응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식상으로는 ‘누님’이 국화의 비유처럼 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화자가 도달하고 싶은 이상적 성숙의 형상으로 보입니다. 연의 끝에 '…했나 보다'라는 단정이 아닌 겸손한 추정의 어조를 사용하여, 화자가 깨달음에 도달해 가는 주체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조용한 통찰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 방향의 해설도 있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한 인간은 전체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로, 더 나아가 ‘하나의 존재는 온 우주와 맞물려 있다’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세상 만물이 서로 기대어 생기고 사라진다는 가르침)로 보면, 국화의 개화는 인연의 총합입니다. 소쩍새·천둥·무서리·‘나’가 얽혀 한 송이 국화꽃의 개화를 가능하게 하고, 이 조건들은 3연의 ‘누님’이 원숙한 존재로 서기까지의 사회·자연·정서적 조건과도 겹칩니다. 끝의 '-았나 보다'는 화자가 전지적 해설자가 아니라, 자신도 인연의 그물 속 하나의 조건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하는 말투로 들립니다. 결국 연기설로 보면 이 시가 전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 존재의 성숙은 홀로가 아니라 함께의 결과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