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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메리 Dec 02. 2023

정신건강의학과 두번째 방문-평생 관리해야만 하는 병

또다른 동반자-우울증

두번째 방문이 괜히 더 긴장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의사 앞에만 앉으면 머리가 새하애 졌다.

그래도 드문드문 말을 이어가다 보니 이야기가 되었다.


-어떠셨어요?

-어... 잠이 많이 왔고요. 약 효과인지 조금 감정기복이 덜해진 것 같았어요. 회사에서 짜증 나는 일이 있어서 화가 나긴 했는데 이전이랑 다르게 금방 가라앉았어요.


-지난 문장 완성 검사에서 궁금한 문장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요? '가족들은 나를 잘 모른다.'라고 쓰셨는데 왜 잘 모른다고 생각하시나요?

-가족들이랑 대화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요. 가족들은 나를 강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나한테 기대는 것 같아요. 근데 실제로는 안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을 남편한테 되게 많이 말해요. 남편이 그런 나를 받아주는 게 조금 힘들 것 같아요.


-그러시군요. 우선 이번주에는 뉴프람정 10mg로 증량이 될 거예요. 이건 상태가 나빠져서 그런 게 아니고 원래 이게 적정 용량이거든요. 이전에 처방했던 건 적응기간이라서 소량으로 처방했던 거고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세요. 대신 잠이 많이 온다고 하셨으니 저녁에 드시는 게 좋겠어요. 아침, 저녁 나눠먹는 것보다 저녁에 한꺼번에 드시는 게 더 편하실 거예요.


약을 먹어서 효과가 있는 건 좋았지만 약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싫었다. 그래서 약을 언젠간 끊을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저... 그런데 이 약을 계속 먹어야 할까요?

-환자분은 가족력도 있으셔서 혈압관리나 당뇨관리처럼 관리한다고 생각하시는 게 마음 편하실 거예요. 


가족력이 있어 약을 계속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우울해졌다.

유전이란... 어쩔 수 없는 건가.

나의 삶은 이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나의 의지로 극복해보려 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는데 이젠 그냥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면서 사람은 정말 유전자의 생존 기계일 뿐이라는 사실에 공감은 갔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나인데... 그놈의 유전자.


어쨌든 약이 효과가 좋으니 다행인가.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 항우울제 처방이 유독 낮다고 하던데 나도 그래서 편견이 있나 보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살려면 약과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꺼림칙했다.


하지만 나의 변화를 가장 반기는 건 역시 남편이었다.

평소대로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언성이 높아지지 않고 차분하게 하는 걸 보고 놀라워했다.

정말 차분하다면서 이대로라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우아한 여자가 될 수 있겠다면서 반겼다. 


회사에서도 평소라면 엄청 짜증 났을 이상한 소리들을 그냥 넘길 수 있었다.

그전에는 참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썼을 텐데 이번에는 그냥 말 그대로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니들이 그런 소리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라는 자세.


남편은 옆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정말 이게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면서 감탄했다.

머리로는 자기와 다른 나를 이해했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걸 진정으로 공감하진 않았던가 보다.

그런데 약을 먹고 달라진 나의 태도를 보고서 이게 정말 의지로 안 되는 거였다는 게 실감이 난다고 했다.

내가 정말로 남편의 말처럼 주의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그게 안된다고, 가장 답답한 건 나라고, 내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봤는데도 안 된다고 옆에서 다 봐서 알지 않냐고 그렇게 외쳤을 때는 안 다가왔던 게 이제야 다가왔나 보다. 


그러다 어느 날 약을 회사에 두고 집에 왔다.

하루 못 먹는 것뿐인데도 엄청 불안했다.

그 불안은 술을 먹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남편이 옆에 있어줘서 별일 없이 그냥 잠들 수 있었다. 


문제는 다음 날 회사에서 있었다.

약을 안 먹고도 괜찮았으니 하루쯤은 완전히 건너뛰어볼까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아주 살짝 짜증 나는 일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그냥 넘기면 되는데 왜 자꾸 이럴까.


결국 그날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위염으로 근무 중에 급하게 응급실을 다녀와야 했다. 

위염으로 이틀을 고생하면서 건강하던 내 몸에 자꾸만 이상 반응이 나타나는 게 정말 의문스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남편을 만나고 아니 남편과 결혼을 한 이후부터 이전에 없었던 병들이 자꾸 생긴다.

면역력이 약해졌니 갱년기니 하는 건 잘 모르겠고, 역시 마음의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긴장이 풀어져서 편해져서 마음껏 아픈 건가...

아무튼 몸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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